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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Aug 01. 2024

삐걱거리지 않고 맨발로 질주하는 ‘파일럿’


▲김한결 감독이 연출한 영화 '파일럿'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굴지의 항공사 파일럿으로 일하는 ‘한정우’(조정석)는 회식 자리에서 여성 동료들을 비하해 해고당한다. 재취업을 시도하지만, 이미 업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 한 저가 항공사에서 여성 파일럿을 대규모로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허송세월하던 한정우는 재취업을 위해 뷰티 크리에이터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여성으로 분장한다. 그리고 여동생의 이름으로 재취업에 성공한다.


이후의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간다. 영화는 남성이지만 파일럿의 삶을 위해 여성으로 분장한 한정우의 좌충우돌 회사 적응기를 코믹하게 그린다. 한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남성 목소리를 내고, 치마를 입은 채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동료들을 당황하게 한다. 여성 분장을 한 상태로 남성 화장실에 들어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다소 뻔하고 유치한 상황이지만,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이 같은 진부함을 돌파한다.


‘파일럿’의 포인트는 남성이 여성 분장을 한다는 데 있다. 고전소설 ‘방한림전’(方翰林傳)의 반대 사례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이지만, 입신을 위해 평생 남장을 하며 영웅적 삶을 영위한다. 2007년에 방영했던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역시 남성만 취업할 수 있는 카페에 입사하기 위해 여성이 남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다른 사례로는 ‘드랙 퀸’(drag queen)이 있는데, 퀴어 문화의 일종이다. 이들은 주로 공연·패션계에서 활동한다.


‘파일럿’을 오락적 복장전환 영화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직업 정체성과 젠더 정체성 모두 자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광의의 트랜스젠더 영화로 명명할 수도 있다. 한정우는 남성이지만 파일럿으로 살기 위해 여성의 삶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흔하게 당하는 성차별과 젠더적 위계를 경험한다. 그는 여전히 이성애자 남성이고, 남성 파일럿이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부장이지만, 잠시나마 여성으로 체화해 자신의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한다.


▲김한결 감독이 연출한 영화 '파일럿'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트랜스젠더는 한국영화, 특히 대중상업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소재다. △이해영·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2006)에서 류덕환 △장진 감독의 ‘하이힐’(2014)에서 차승원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2016)에서 구교환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에서 박정민이 트랜스젠더를 연기했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2005)도 이준기가 복장전환을 통해 여성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이 계보에 살짝 발을 얹을 수 있다.


이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트랜스젠더는 대개 비중 없는 감초 캐릭터로 등장했다. 이상한 볼거리로 대상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파일럿’은 조정석이라는 스타 배우가 여장남자를 연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편하지 않은 유머로 소수자 혐오도 슬기롭게 피해간다. 다만 귀하고 참신한 소재에 비해 엉성하고 극단적인 상황 설정은 영화의 완성도를 해친다. 일부 남성 캐릭터가 배우의 무게감에 비해 기능적으로 소비된 측면도 아쉽다.


‘파일럿’은 생존하기 위해 성별을 바꿔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엔딩 시퀀스에서 자신이 남성임을 밝히고, 환한 대도시를 맨발로 질주하는 조정석의 이미지는 보는 이에게 통쾌감을 선사한다. 발에 맞지도 않는 하이힐을 신고 삐걱거리기보다 맨발로 질주하는 삶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인간에게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 ‘파일럿’은 마지막 장면만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김한결 감독의 ‘파일럿’은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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