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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Nov 12. 2024

완성형이 아닌 생성형의 영화이미지, <룩백>


<룩백>(2024)의 이미지는 완성형이 아니라 생성형에 가깝다. 그 이유는 영화가 단순히 자라나는 청춘의 성장담을 그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룩백>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삼는다. 동시에 두 사람의 이미지를 둘러싼 감각이 스크린 너머로 물결치는 파동형의 모양새를 보인다. 언어로 뚜렷하게 산출할 수 없는 이미지와 감각. 그렇게 영화는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미지로만 수렴하지 않고, 스크린 앞에 있는 관객들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그저 보여줄 뿐, 뚜렷한 설명이 동반되지 않는 특정 이미지들로 인해 <룩백>은 두 여성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된다.


스크린 너머로 물결치는 감각



<벌새>(2019)로 예를 들어보자. 이 영화는 1994년, 만화가를 꿈꾸는 열네 살 소녀 은희가 겪었던 일들을 다루고 있다. 1994년에는 성수대교가 붕괴했고, 김일성이 죽었으며, 유례없는 폭염으로 100여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들의 당사자는 정확히 누구인가. 나와는 무관한 일 혹은 비일상적 사태로 보이는 이 사건들로부터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벌새>는 어째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되는가.


은희는 1994년에 외삼촌과 한자 선생님 영지의 죽음을 목도한다. 은희가 엄마에게 “외삼촌 보고 싶어?”라고 묻자 엄마는 “그냥 이상해. 외삼촌이 이제 없다는 게”라고 답한다. 외삼촌은 죽기 전 어느 날, 취한 채로 은희의 집에 불현듯 찾아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돌아간다. 외삼촌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간 뒤, 자동 센서가 꺼지고 나서도 카메라는 한참이나 텅 빈 현관을 응시한다. 문을 열고 나간 외삼촌이 어디로 갔는지 카메라도, 은희도 알지 못한다. 외삼촌이 사라진 텅 빈 현관의 이미지는 스크린 내부에 속박된 ‘닫힌 이미지’가 아니라 이른바 ‘열린 이미지’가 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저마다의 흔적과 상처, 기억을 그 빈 공간에 투영한다.


<벌새>의 마지막 장면에서 은희는 운동장에서 웃고 떠드는 친구들의 모습을 생경한 듯이 바라본다. 카메라는 그런 은희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이 순간 카메라가 실제로 보는 것은 열네 살 소녀 은희를 둘러싸고 있는 무형의 것들이다. 카메라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를 휘감고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거기에 성수대교 붕괴로 목숨을 잃은 영지의 목소리가 있다. 카메라가 슬로모션으로 은희의 시간을 확대하는 순간, 죽기 전 영지가 은희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의 일부가 흘러나온다. 생명이 물결치는 듯한 소녀들의 웃음 위로 생명이 끊어진 자의 음성이 흐른다.


은희의 육체가 가시화된 실존적 이미지라면, 영지의 목소리는 비가시화된 정신적 이미지다. 카메라는 은희를 통해 영지의 존재감을 환기한다. 말이 없는 은희의 이미지와 육체가 없는 영지의 음성이 묘한 합일을 이룬다. 이 같은 길항작용으로 인해 <벌새>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하며 관객 각자의 이야기로 환원된다. 특정한 의미로 기호화되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건조한 대답과 외삼촌의 부재를 응시하는 카메라의 서늘한 시선, 빈 공간을 느리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 등은 <벌새>의 저류에 흐르며 은희가 영지의 죽음을 버티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예는 무궁무진하다. <바다가 들린다>(1993)의 주인공 타쿠는 절친한 친구 유타카가 리카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를 배려하기 위해 그녀에게 관심 없는 척 연기한다. 하지만 타쿠 역시 마음속으로 리카코를 좋아했다. 애써 자신의 진심을 숨기며 어설프게 행동한 타쿠는 유타카는 물론 리카코와의 관계도 어긋나 버린다.


영화의 제목이 ‘바다를 보다’가 아니라 ‘바다가 들린다’인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이미지가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다’라는 감각이 중요한 이 영화는 대학생이 된 타쿠가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는 거대한 플래시백 구조로 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과거의 기억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현재의 타쿠를 덮치는 이야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학생이 된 타쿠와 유타카는 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유타카가 타쿠에게 말한다. “그때 내가 화가 났던 건 네가 날 배려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야. 그전에는 전혀 눈치 못 챘어. 네가 리카코를 좋아한다는 걸.”


이 순간 타쿠가 보았던 것은, 아니 들었던 것은 유타카의 말이 아니라 그 시절 애써 모른 척했던 자신의 마음의 소리였을 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가시성이 아니라 가독성이다. 말을 걸어오는 영화의 소리를 독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카메라는 조금 물러나 타쿠와 유타카의 뒷모습을 풀 숏으로 잡는다. 두 사람과 관객 사이를 중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의 귀에는 어떤 과거의 소리가 들리느냐고. 그러면서 카메라는 누구의 시점인지 알 수 없는 숏으로 바다를 포착하고, 시각보다 청각에 끊임없이 호소하며 정서적으로 강한 울림을 전한다.     


틈과 간격으로서의 영화이미지


<룩백>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시작, 카메라는 전능한 마법사의 움직임으로 후지노의 집에 날아든다. 카메라는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후지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가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의 육체와 정신, 기억과 꿈의 공간으로 접속하기. 이 같은 장면들에서 보이는 카메라의 운동성은 영화의 시간과 관객의 시간을 절묘하게 포갠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결심, 왠지 모르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감각, 처음으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났을 때의 환희. 예의 그 봄바람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관객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흔든다.


교지에 네 컷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는 어느 날 쿄모토의 그림을 보고 좌절한다. 쿄모토가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나 보여서다. 그것은 쿄모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후지노는 쿄모토의 드로잉 실력을 시기하고, 쿄모토는 후지노의 스토리텔링 능력을 흠모한다. 시기와 질투, 동경과 흠모를 오가는 두 여성의 감정을 카메라는 섬세하게 쫓아간다. 특히 그림을 포기한 후지노가 쿄모토의 고백에 예정에도 없던 공모전을 준비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그렇다. 쿄모토의 칭찬에 고조된 후지노는 비 오는 골목길을 힘차게 뛴다. 카메라는 마치 후지노의 몸에 꿈을 불어넣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두 여성은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가며 함께 공모전을 준비한다. 두 사람이 편의점에서 공모전 당선 결과를 확인할 때, 카메라는 순간적으로 그들이 있는 공간을 빠져나와 편의점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을 바라본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쿄모토가 후지노에게 진심을 담은 고마움을 전할 때도 카메라는 그들 곁을 잠시 떠나 지하철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을 바라본다. 두 장면에서 카메라는 주인공과 거리 두기를 하며 이차 프레임을 통해 사태를 관망한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영토를 이탈해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카메라가 보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관객들 역시 잠깐 뒤로 물러난다. 인물과 관객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자리에서 영화는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미지를 통해 관객이 각자의 이야기를 스크린 위에 펼칠 수 있도록 한다.


<룩백>의 또 다른 특징은 카메라가 인물의 뒷모습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영화는 후지노의 뒷모습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뒷모습은 관객이 인물의 표정을 명확히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비가시적이지만, 그것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시적이다. 이 대목에서도 반복해 말할 수 있다. 후지노의 뒷모습은 가시성보다 가독성이 더 중요하다. 관객이 후지노의 표정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후지노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그림을 그린다. 그 모습을 카메라 역시 뒤에서 고정된 상태로 오랫동안 바라본다. 여기서도 영화의 시간과 관객의 시간은 마법처럼 겹친다. 움직이는 이미지로서의 영화가 움직임을 거의 멈추고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영화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사진이미지의 효과를 창출하는데, 거의 정지되어 있는 듯한 후지노의 뒷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나도 거기에 있었다’라는 환상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가시화하지 않은 후지노의 뒷모습을 통해 관객은 자신의 앞모습을 읽어내며 일종의 허위적인 환상 서사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와 서사를 생성하며 관객 고유의 것이 된다.


<룩백>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 후지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오프닝에서는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앞모습이 탁상 위 거울에 반사되어 관객의 눈에 보인다. 하지만 엔딩에서 카메라는 후지노의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오프닝과 달리 엔딩에서는 바깥 배경의 가시적 변화와 함께 후지노의 부재를 함께 보여준다. 즉 오프닝이 완벽한 후지노의 서사라면, 엔딩은 후지노의 서사를 관객이 재전유하도록 유도한다. 영화는 후지노가 사라진 그 자리에 무수한 개인들을 스크린 내부로 호명하면서 지극히 사사로운 마음의 풍경을 완성한다.


영화의 마지막, 불의의 사고로 쿄모토를 잃은 후지노는 아무 말 없이 만화를 그린다. 이러한 후지노의 행위는 “그럼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리는 거야?”라는 쿄모토의 대사(영화의 마지막 대사)와 공명한다. 요컨대 후지노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그것이 쿄모토와 함께 했던 시간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미지는 결코 특정 의미로 기호화되지 않는다. 영화의 시간과 관객의 시간이 어지럽게 포개질 뿐 완벽히 등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을 나누던 후지노와 쿄모토가 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후지노와 쿄모토의 뒷모습처럼, 마음을 다했던 관계도 언젠가 끝날 수 있는 것처럼. <룩백>의 이미지들은 하나의 기호로 수렴하지 않고 자꾸 변주되며 관객의 마음으로 유입하는 탈기호적 특성을 보인다.     


주인공의 사사로운 체험이 우주적 보편성을 얻는 이유


관객의 마음은 어떻게 영화의 풍경이 되는가.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하는가. 주인공의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책과 볼펜, 뭐라고 적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희미한 포스트잇 문구 그리고 탁상시계는 왜 관객의 마음을 흔드는가. 단지 소품에 지나지 않는 영화의 도구들이 현실의 의미를 획득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미지의 주인이 뚜렷하게 상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벌새>의 텅 빈 현관과 <바다가 들린다>의 바다, <룩백>의 마지막 장면은 일종의 틈과 간격으로서의 이미지다. 그 틈과 간격에 관객의 자리가 있다. 영화가 주인공의 사사로운 체험에 의한 개별적 장면을 통해 우주적 보편성을 얻는 방식이다. 스크린을 벗어난 외화면의 세계를 통해 나와 우리의 세계를 인지하기. 영화가 현실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연장된 현실은 영화보다 물리적으로 더 큰 세계다. 그 세계에 바로 우리가 있다.


<룩백>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어느 한 시기를 통과했구나, 라는 감각에 관한 영화다. 그런 감각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은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그저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뿐임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특정한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관객의 마음에 리플레이되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영화. 그런 영화는 어쩌면 흘러간 시간을 복원할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김호영, 『영화이미지학』, 문학동네, 2014


기획회의 61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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