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감독들이 자기 의지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런 토양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제2의 봉준호나 박찬욱은 나올 수 없다.
최근 본지와 만난 김동현 서울독립영화제(SIFF) 집행위원장은 한국영화의 미래를 진단하며 이같이 밝혔다.
20여 년 전인 2003년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꼽힌다. 박찬욱과 봉준호가 각각 ‘올드보이’와 ‘살인의 추억’을 들고나온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이 외에도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지운의 ‘장화, 홍련’ 등이 개봉해 평단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특히 같은 해 연말 강우석의 '실미도'가 개봉, 한국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영화가 질적·양적으로 크게 팽창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같은 한국영화 발전은 영화제 발전의 역사와 맥이 닿아있다. 신인 감독·배우들을 발굴하는 요람(搖籃)으로 기능하는 영화제는 영화산업 생태계의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최근 영화제는 정부의 예산 삭감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다.
최근 5년간 정부는 40~50개 영화제에 대해 매년 60억 원가량의 예산을 지원해 왔다. 하지만 올해는 11개 영화제에 28억 원을 지원하는 데 그쳤다. 전체 지원금액은 절반이상 삭감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SIFF가 내년에 지원받는 예산은 0원이다.
김 위원장은 "영화제는 육성보다는 발굴의 기능이 강하다. 영화제가 신인 감독·배우들을 발굴하면, 향후 이들이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제작이나 투자·배급 단계에서 지원이 들어가야 하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이런 지원이 더욱 축소됐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영화 행정도, 산업도 새로운 창작자가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뒷받침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20년 전보다 퇴보했다"라며 "설상가상으로 올해부터 영화제 예산이 대거 삭감하면서 코로나19를 거치며 도래한 영화의 위기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SIFF는 국내 최대 규모의 독립영화제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독립영화를 지원하고, 동시대 한국영화의 모습을 조망하는 장으로 기능하는 영화제다. 또한 신인 창작자들의 영화를 홍보하는 것은 물론 관객들에게는 다양하고 새로운 영화적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다.
김 위원장은 "영화제는 영화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잇따른 영화제 지원 예산 축소 소식은 창작자가 서 있는 영화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기반을 만들어왔던 SIFF 예산이 삭감된다면, 그만큼 독립영화의 생태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게 김 위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올해 예산 역시 20% 삭감된 상황에서 안간힘을 다해 영화제를 준비 중이다. 특히 정부안 기준으로 내년 예산이 전액 삭감된 상황이라 국회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라며 "한국독립영화협회를 포함한 영화인들이 국회 등에 정상화 촉구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창작자 중심'…변요한·이제훈·박정민 배출
SIFF는 부산국제영화제·전주국제영화제·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등과 달리 톱다운(Top Down)이 아닌 바텀업(bottom-up) 방식의 영화제다. 전자가 지역 브랜딩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자는 철저히 창작자 중심이다.
김 위원장은 "신인 감독들이 어렵게 영화를 만들면, 그것을 틀어야 하는 게 SIFF의 역할이다. 창작자 중심의 영화제이기 때문에 SIFF를 통해 데뷔하면 일종의 창작 생태계가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신인 감독들을 포함해 배우, 프로그래머, 평론가 등도 많이 배출된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충무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변요한, 전여빈, 이주영, 이제훈, 박정민 등은 대표적인 SIFF 출신 배우들이다. SIFF는 2018년부터 배우 오디션인 '배우 프로젝트'를 실시 중이다. 매해 2000여 명의 신인 배우들이 지원하는 등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올해 지원자 수는 역대 최다인 4856명으로 작년보다 1916명 증가했다.
또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D·P' 시리즈의 한준희를 포함해 제76회 칸영화제 공식 초청작인 '잠'을 연출한 유재선 등은 SIFF와 함께 성장했다. 이 밖에도 '똥파리' 양익준, '벌새' 김보라, '메기' 이옥섭,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등 한국영화의 대안이 되는 새로운 창작자가 SIFF를 통해 소개됐다. 최근에는 '괴인' 이정홍, '장손' 오정민, '딸에 대하여' 이미랑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SIFF가 감독과 배우의 요람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다"라며 "기존 배우들 역시 상업영화와 달리 독립영화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경력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배우 송중기는 '화란', '로기완',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 등 비교적 규모가 작은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자신의 영화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특히 '화란'은 송중기가 노개런티로 출연한 영화로 제76회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창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를 '배우들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윤여정 배우에게 오스카를 안긴 미국의 독립영화 '미나리'도 브래드 피트가 제작했다. 이제 배우들도 규모에 상관없이 자신의 매력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영화에 출연하거나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중요해졌다.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라고 해서 반감을 갖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라고 설명했다.
오는 28일 개최를 앞둔 SIFF의 메인 슬로건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전'이다. 이는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영화제의 변화 의지를 담은 초기 슬로건이다. 그 목표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취지에서 결정한 슬로건이다.
올해 SIFF 출품작은 1704편으로 전년 대비 330편 증가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극영화 90편, 다큐멘터리 21편, 실험영화 6편, 애니메이션 16편 등이다.
지역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2022년부터 시작한 '로컬시네마' 역시 진행된다. 지난해 영진위가 지역영화 예산을 전액 삭감하는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작된 지역영화 13편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김 위원장은 "SIFF는 한국 독립영화의 최전선이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에는 어떤 공간이 있는데, 그 간극을 좁혀야 영화산업의 허리가 튼튼해진다. 실력과 창의력이 넘치는 신인 감독들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그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을 SIFF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영화제가 발굴한 신인 감독들의 두 번째 장편영화가 산업의 조력을 받아서 완성되는 모델이 갖춰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감독들의 창의력이나 개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라며 "지금 상업영화 시장을 보면 다양성이 사라진 것 같다. 시장이 획일화되어 버렸다.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천편일률적인 흥행공식을 따른 결과"라고 지적했다.
주요 상업영화들을 투자·배급하는 집단이 전부 대기업이기 때문에 손실에 대한 우려와 방어적 태도를 정부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해결해야 한다는 게 김 위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지금 영진위에서 추진 중인 중예산 영화 지원도 중요하지만,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고 가는 방향은 맞지 않다"라며 "자본의 형태가 다양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