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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Dec 21. 2024

어느 새벽달이 지나가네

1.


곧 2025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시간이다. 나는 2004년에 중학생이 됐고, 2010년에 대학생이 됐다. 그때는 뭔가 확실히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과 이후는 내가 다른 시간 속에 살았거나,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특히 스무 살 이후에는 이 같은 기분에 더욱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김연수 작가는 "스무 살 이후에는 스물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라고 했는데, 서른 중반을 앞두고 있는 나는 요즘 이 말을 실감한다.


2.



올해 본 영화 중에 정서적으로 가장 좋았던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요시야마 키요타카의 <룩백>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20대를 어지럽고 치열하게 보냈다. 대구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던 시기.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엄마는 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거의 매주 대구에 내려갔다. 친구들이 다 취업하고 돈을 벌고 있을 때, 나는 곰팡이 냄새가 나는 대학원 신문사 연구실에서 영화 <동주>를 컷 바이 컷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옆에 있던 동료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그 후로 나는 기자가 됐고, 그 동료는 최근에 박사가 됐다.


3.


나는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는다. 대학교 친구는 아예 없다. 대학원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도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거의 만나지 않는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동료들이 있지만,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과 교류한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몇 없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와도 잘 지낸다. 수더분하다. 물처럼 잘 흐르고 스며드는 특성이 그들에게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쿨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이 나처럼 모난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4.


나는 <룩백>을 보고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어느 한 시기를 통과했구나, 라는 감각을 경험했다. 젊은 엄마와 내가 손을 잡고 슈퍼에 갔던 날, 나는 엄마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과자가 싫다고 말했다. 문창과 입시 시험 때 '아침 골목'이라는 시제를 받아 들었던 순간, 열심히 글을 쓰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보았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암에 걸려 누워있는 엄마가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지"라고 말했을 때, 나는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냥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 모든 순간들이 과거가 되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이 영화가 내게 말해주었다. 이런 감각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은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은 단 한 가지. 그저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는 걸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5.


시간이 갈수록 인간관계가 힘들다. 직업 특성상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나를 만나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기자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누구를 만날 때마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를 0으로 낮춘다. 그 사람이 나에게 조금 못해도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삶이 건조해진다. 내가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를 0으로 낮추면, 그들도 나에 대한 기대치를 0으로 낮춘다. 내가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열렬하게 사랑하지 않는다.


6.



하현상이라는 가수를 좋아한다. 직접 곡과 가사를 쓴다. 듣기 좋은 미성이다. 목소리를 얇고, 여리고, 가냘프게 뽑아낸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묘한 음색이다. 하현상은 늘 지나간 것을 이야기한다. 지나간 것을 그리워한다기보다 애처롭게 바라본다. 내 곁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을 그저 멀리서 바라본다. 혹은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좀 더 돌봐줘야겠어"(<등대>)라고 말하거나 "지나가버린 시간이라도 흘러간 대로 견뎌 내야겠죠"(<시간의 흔적>)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면서 "떠밀려가던 내 뒷모습 같아"라고 읊조린다(<불꽃놀이>). 최근에 콘서트를 다녀왔는데, 그는 팬들에게 자꾸 어딘가로 숨으려고 하는 가수를 좋아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디로 숨고 싶은 걸까. 콘서트를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의 노래가 아닌 그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7.


영화를 공부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있어서 그나마 삶이 덜 외롭다. 내년에도 좋은 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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