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박 7일 독일 출장 중 하루 시간을 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영화박물관에 들렀다. 개관하는 오전 11시에 가서 폐관하는 오후 6시까지 있었다. 상설 전시만 보는데 5시간 넘게 걸렸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1인 출판사 사장님과 함께 갔다. 생전 처음 만난 분과 함께 하루 종일 전시를 구경한다는 것도 색다른 체험이었다. 내가 먼저 귀국하게 됐는데, 하나 남은 육개장을 선물로 드렸다. 음, 각설하고...
티켓이 이렇게 생겼다. 1~2층 상설 전시와 3층 특별 전시를 모두 관람하는데 14유로다. 한화로 대략 2만3000원 정도다.
1층 상설 전시관에는 '영화적 인식'의 발전 과정과 관련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시초가 되는 게 바로 피프쇼(PEEP SHOW), 즉 상자 속의 세계다. 나무로 만든 직사각형 상자 안에는 여러 장의 그림판이 층층이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그림에는 거리 풍경이나 사람들의 모습이 원근법에 따라 그려져 있다. 맨 아래 구멍을 통해 보면 각각의 그림들이 하나의 입체적 그림처럼 보인다.
바로 이렇게...! 눈으로 직접 봐야 뒤에 있는 그림들도 선명하게 보인다. 카메라로 찍으니 뭔가 좁고 흐릿하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상자지만, 이 작은 구멍은 '세계로 통하는 입구'였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초월해 낯선 공간이나 사건을 보는 놀라운 체험이기도 했다. 훗날 영화 관람 방식(어두운 공간에서 하나의 프레임을 응시하는 구조)의 원형이 되었던 것.
18세기 초부터 유럽에서는 노점상들이 장터 등에서 이 같은 피프쇼를 선보였다. 역시 영화는 장터의 예술... 또 소형 피프쇼가 중산층 가정의 거실에도 들어왔다. 피프쇼는 도시 풍경뿐만 아니라 자연재해, 전투 같은 비일상적인 장면도 보여줬다. 사람들이 넓은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 가장 초기의 대중 매체라고 보면 된다.
이건 '마녀의 거울'이라고 불린 19세기 독일의 시각 장치다. 설명문을 보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여러 개의 작은 곡면 거울이 평평한 거울면 위에 배열되어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모습을 복제하고 왜곡하며 변형시킨다."
요컨대 이 장치는 '자기 이미지의 변형과 분열'을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기구다. 위 사진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의 거울면에는 9개의 볼록렌즈형 거울이 있는데, 관람자의 얼굴이 여러 개로 나뉘어 비친다. 과학적으로는 '광학적 실험 도구'이지만, 미학적으로는 '자기 인식의 파편화'를 보여주는 장치인 것. 당시 유럽에서는 이를 '왜곡 거울', '마녀 거울'로 불렀다.
이건 타우마토로프(Thaumatrope)라는 기구다. 정지된 이미지가 어떻게 '움직임'으로 인식되는지 보여준다. 이 기구는 잔상 효과를 설명할 때 거론된다. 사진 속에 보이는 실을 손가락으로 비틀며 빠르게 회전시키면, 두 그림이 겹쳐 보이면서 하나의 장면처럼 움직이는 착각이 생긴다. 위 사진을 예로 들면, 어미 새가 둥지로 내려오는 동작처럼 보인다. 행동의 연속성을 시각화한 초기 애니메이션의 원리라고 보면 된다.
영상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빠르게 돌릴수록 어미새가 둥지로 가까이 다가가 아기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듯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이렇게 1층 전시관에는 타우마토로프로 시작해 움직임의 재생을 구현한 '조이트로프', 개인이 직접 체험하는 손 안의 영화인 '플립북' 등 영화의 발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영화학도라면 다 아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도 만날 수 있다.
위 사진은 조이트로프다. 영어로는 '생명의 바퀴', 독일에서는 '기적의 북'이라고 불렸다. 원통 내부에 연속적인 그림 스트립을 넣고, 겉면의 가느다란 틈을 통해 안쪽을 보면 정지된 그림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진은 1900년 전후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 상업적으로 제작된 플립북들이다. 이미 영화가 하나의 상품, 문화 기념품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가정이나 거리에서도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게 만든 휴대용 미디어인 셈인데... OTT의 원류라고 보면 될까?
이건 조지 이스트먼의 코닥 No.1이다. 1889년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롤필름 카메라다. 광고 문구가 상징적이다.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진 우리가 합니다.)
사진의 대중화를 상징하는, 근대적 소비문화의 출발점이 된 카메라다. 앞면 중앙에 렌즈가 있고, 윗면에는 셔터 레버와 셔터 릴리즈 버튼이 있다. 내부에는 감광지를 감은 롤필름이 들어 있다. 지금처럼 필름을 감고, 찍고, 다시 감는 개념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다. 1891년부터 개발해 1894년에 상업화한 장치다. 키네토스코프는 '움직이는 것을 본다'라는 뜻이다. 이 장치는 영화 필름을 연속적으로 빠르게 통과시켜 렌즈와 조명, 기어 장치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구현한다. 오른쪽 상단에 있는 뷰어로 아래를 들여다보면 내부의 전구가 켜지고, 기어로 움직이는 셀룰로이드 필름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영상이 재생된다. 지금처럼 스크린에 투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사람이 들여다보는 개인용 시각체험 장치다.
에디슨은 이 장치를 통해 1894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키네토스코프 팔러를 열었다. 여러 대의 기계를 한 줄로 세워 관람객이 한 대씩 동전을 넣고 차례로 보는 형식이었다. 오늘날의 영화관, 오락기, 심지어 VR 체험기까지 모두 이 구조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그러나 키네토스코프는 한 번에 한 명만 볼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곧이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가 이를 대체하게 된다.
이게 바로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다. 1895년에 완성된 세계 최초의 상업적 영화촬영 및 영상 기계다. 한 번에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투사식 상영을 가능하게 해 '극장으로서의 영화' 탄생을 알렸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 기계를 통해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카페 지하 살롱에서 세계 최초의 유료 상영회를 열였다. 대표작은 다들 아는 것처럼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열차의 도착' 등이 있다. 이 상영이 바로 영화 탄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2층 상설 전시관에는 배우의 연기, 음향, 이미지, 편집 등 영화의 여러 요소들을 전시하고 있다. 각 요소들에 대한 영화이론가, 영화평론가, 영화감독들의 격언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얼굴과 비교될 수 없다. 얼굴은 결코 탐구를 멈출 수 없는 하나의 나라이다." -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영화 속의 소리와 그 소리가 만들어내는 패턴은 덧없고 순간적이다. 바로 그 덧없음이 이 기술의 힘의 일부를 이룬다. 소리는 매우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거의 눈치채지 못한 채 지나간다." - 데이비드 보드웰
"부드럽고, 위험하고, 꿈같고, 살아 있고, 죽은 듯하고, 맑고, 흐릿하고, 뜨겁고, 격렬하고, 황량하고, 돌연하고, 어둡고, 봄처럼 생기 있고, 스며들고, 밖으로 뻗어나가며, 곧고, 비스듬하며, 감각적이고, 제압적이며, 제한적이고, 독성 있고, 안심시키는, 밝은 빛. 그것이 빛이다." - 잉마르 베리만
"몽타주의 힘은 관객의 감정과 이성이 창조적 과정에 참여한다는 데 있다." -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
2층 상설 전시관의 하이라이트는 4개의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색깔, 빛, 음악, 편집, 카메라 구도 등 유사성이 있는 영화 4편을 동시에 틀어서 감상하게 한 섹션이다. 위 사진의 주제는 '빛'이다.
3층 특별 전시관에는 롱 테이크가 인상적인 영화의 클립들을 고전부터 현대까지 전시하고 있다. 한국영화로는 유일하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가 아는 장도리 씬이 클립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올드보이>가 나오는 모니터에는 존 G. 아빌드센의 <록키>, 거스 밴 샌트의 <엘리펀트>,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존 카펜터의 <핼러윈> 등도 함께 나온다. 아마도 폭력의 미학이나 광기의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들 속 롱 테이크 장면을 묶어 놓은 것 같다.
롱 테이크란 컷 없이 한 호흡으로 길게 찍는 걸 말한다. 숏폼 등 짧은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롱 테이크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시선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컷의 홍수 속에서 길게 이어지는 한 장면이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지속은 일종의 명상과도 같다. 롱 테이크는 '무엇을 얼마나 오래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다.
이 전시관에도 롱 테이크를 예찬하는 평론가, 감독들의 문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하나만 소개하면...
"우리는 인생을 하나의 롱테이크처럼 경험한다. 인생은 끊김 없는 하나의 숏이다. 편집이야말로 인위적인 장치일 뿐이다." - 샘 멘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