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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Sep 30. 2018

<소공녀>, 나대로 사는 기쁨과 작지만 소중한 행복

※ 이 글은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13)에도 실렸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https://brunch.co.kr/@sssp0112/476


일반적인 로드 무비(road movie)는 주인공의 변화와 자각에 초점을 맞춘다. 여행, 도주, 방랑 등을 통해 주인공은 전에 없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자신과 주변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사유한다. 이러한 번뇌와 깨달음의 서사는 관객들에게 단순한 관람의 즐거움을 넘어 주인공과 함께 성장했다는 체험의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소공녀>는 보통의 로드 무비와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영화는 그러한 장르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인 미소(이솜)의 성장을 담아내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히려 미소가 거쳐 가는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 변화를 포착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선 관습과 규율을 무시하고 방랑하는 주인공의 액션에 대한 주변인들의 리액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변인들의 리액션은 곧 관객들의 리액션이기도 하다. 만약 관객들이 미소의 여정을 조금 생경하거나 불편하게 느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소가 만나는 인물들에게서 불현듯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들은 변변한 직장은커녕 집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미소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담배와 위스키 때문에 집을 포기하는 미소의 선택은 현실 감각이 전무한 판타지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을 오롯한 자신으로 살아내려는 어느 유니크한 청춘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영화는 미소가 살아가는 방식이 정답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타인의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모범적 답안에 가닿아 있음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미소의 친구들 대부분은 일상을 힘겹게 파도치는 열혈 생활인들이다. 그래서 다들 어딘가 부족하고 아프다. 하지만 미소는 그들을 “염치가 없다”거나 “스탠다드”라는 말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녀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마침맞게 변화한 친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들이 반드시 옳아서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갈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소를 시종일관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미소의 고용주인 민지(조수향)다. 미소는 매춘부로 일하는 민지의 집을 청소해주고 품삯을 받는다. 어느 날 민지는 미소에게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다고 고백한다. 창문 너머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민지가 자조 섞인 표정으로 말한다. “제가 좀 헤퍼요 언니. 그래서 벌 받나…….” 그러자 미소가 대답한다. “헤픈 게 어때서요?”


그렇게 미소는 본의 아니게 주변을 위로하며 방랑한다. 친구들 역시 미소로 인해 자신들의 뜨겁고 치열했던 젊음을 잠시나마 되찾는다. 그런 사람이 있다. 존재만으로도 끊임없이 주변을 환기시키는 사람. 그것은 가식이거나 엉터리 위로가 아니다. 희망과 절망의 파고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일궈나가는 어느 자주적인 인간의 선한 영향력일 뿐이다.

 


위스키 한잔을 손에 들고 흩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미소의 표정을 관객들은 오래도록 잊기 힘들 것이다. 특히나 강렬한 것은 왼쪽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팬 쇼트(pan shot)가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팬하며 슬로모션(slow motion)으로 미소의 뒷모습을 포착하는 장면이다. 세상의 흐름 속에 있되 그 흐름을 맹목적으로 쫓아가지 않기. <소공녀>가 시대와 인간을 위로하는 방법은 그렇게도 처연하고 어여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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