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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Apr 16. 2024

한국의 카미가쿠시(神隱し) 그리고 세월호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7년 전, 세월호 3주기 때 쓴 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원제는 <千と 千尋の 神隱し, 센또 치히로노 카미가쿠시>이다. 여기서 '행방불명'에 해당하는 단어가 '카미가쿠시(神隱し)'인데 직역하면 '신(神)의 숨김(隱し)'이라는 뜻이다. 일본어에도 행방불명이라는 단어가 있고 한자 그대로 '유쿠에후메이(行方不明)'라고 쓰는데, 감독은 왜 '유쿠에후메이'가 아닌 '카미가쿠시'라는 다소 묘한 의미를 풍기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카미가쿠시는 '어린아이의 실종'을 일컫는 말로 '신(神)적인 존재가 아이를 숨겼다'고 정의하는 일본의 관용구이다. 그러니까 이 말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실종을 당한 어린아이는 신이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라고 믿는 일본인들의 가슴 아픈 위안이 담겨있다. 이 영화가 영어로는 ‘Spirited Away’로 번역되는데 Spirit이 명사로는 ‘영혼’, 동사로는 ‘감쪽같이 채어 가다’를 뜻한다. Away가 ‘사라짐’을 뜻하는 단어이니 풀어쓰면 '영적인 혼이 아이를 감쪽같이 채어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된다. 실로 적확한 번역이다.



평범한 소녀 '치히로'는 마녀 '유바바'의 덫에 걸려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고 정령들이 득실거리는 온천장에서 노역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하쿠'이다. 하쿠는 유바바에게 마법을 배우러 왔다가 치히로처럼 이름을 빼앗기고 그녀의 부하로 살아가는 마법사이다.


어느 날, 하쿠는 유바바의 명을 받아 그녀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의 도장을 훔친다. 하지만 그 도장에는 그것을 훔쳐간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둠의 마법이 걸려있었고, 제니바의 마법으로 큰 상처를 입은 하쿠는 사경을 헤매게 된다. 치히로는 하쿠를 살리기 위해 제니바를 찾아가 그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고, 치히로의 진심 어린 마음에 감동한 제니바는 끝내 하쿠를 용서한다.



치히로 : “엄마한테 들은 거라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내가 어렸을 때 강에 빠진 적이 있었어. 그 강은 이미 메워졌대. 하지만 지금 기억이 나. 그 강의 이름은 코하쿠. 네 진짜 이름은 코하쿠야.”

하쿠 : “치히로, 고마워! 내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나도 이제 기억났어. 치히로가 내 안으로 떨어졌던 일을··· 넌 신발을 붙잡으려고 했지.”

치히로 : “그래! 그때 네가 날 얕은 곳으로 데려다줘서 살 수 있었어. 고마워!”  


유바바와의 담판을 위해 온천장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치히로는 백룡으로 변한 하쿠의 등을 타고 밤하늘을 날아오른다. 그 순간, 치히로는 어릴 적 ‘코하쿠 강’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기억을 불현듯 떠올린다. 그러니까 하쿠는 원래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라는 이름의 ‘강의 신’이었고, 어릴 적 코하쿠 강에 빠진 치히로를 구해준 수호신이었던 것이다. 치히로의 기적과 같은 기억으로 하쿠는 유바바로부터 빼앗긴 자신의 이름을 되찾게 되고, 치히로 역시 무사히 현실 세계로 귀환한다.


이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단어는 이름기억이다. 치히로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과 하쿠의 이름(존재)을 끝까지 기억했다. 하쿠를 살리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길(제니바가 살고 있는 '늪의 바닥'은 갈 수는 있지만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불가사의의 땅이다.)을 용기 있게 걸었던 치히로의 발자국에는 그 소중한 기억의 순간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 영화에서 이름은 기억을 불러오는 주문처럼 사용되고, 그 주문은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노력할 때 완전한 힘을 발휘한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 있던 304명의 이름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아니, 신이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믿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만, 가슴이 먹먹한 이유는 무엇인가. 가방 끈에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 매년 4월 16일이 되면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끄적이는 몇 자의 글. 이것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위로한다고 말하기엔 너무 초라했기 때문일까.


304명의 이름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후, 대한민국은 어떻게 바뀌었나. 참담하게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배해 파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범조차 지키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의 생명을 맡겼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와 304명의 이름은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치히로 :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쿠 : 응. 반드시!

치히로 : 약속했어?

하쿠 : 그래!


우리는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 세월호에 기억과 위로의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신이 데리고 간 그 304명의 애달픈 존재를,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쿠처럼 물에 빠진 치히로를 구할 수 있는 수호신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과 하쿠의 이름을 끝까지 기억하고자 노력했던 치히로가 결국엔 마법과 같은 기적을 만들어낸 것처럼, 우리의 작은 기억의 노력들이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기적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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