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글쓰기 주제 : 냄새
아 - 미안한데 우리 그만 헤어져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죽이 척척 맞는 것 같고 뭘 해도 멋있고 유머러스해 보였던 그 애가 하루아침에 싫어졌다. 그 애가 다른 여자애랑 눈이 맞은 것도 아니고, 나 몰래 바람을 핀 것도 아니고, 나에게 못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정말 딱 한순간만에 싫어졌다. 어찌나 싫고 뭘 해도 언짢게 느껴지던지 내가 무슨 일을 한 걸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이별을 고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건의 발단은 평소와는 달랐던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홀로 들어가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가까스로 방 안의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적막함을 깨기 위해 보지도 않는 TV를 켜놓고 나 혼자 밥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필요했다. 누구를 부를까 고민하다가 그때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와 내 친구들을 함께 불렀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내 주변이 고요하지 않았으면, 소란스럽더라도 따듯했으면 싶은 날. 친구들 덕분에 이런 나의 바람은 너무나도 쉽게 충족될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금단의 구역인 안방을 제외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 '안방'은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들어오게 해서도 안된다고 배웠다) 거실과 내 방에 친구들이 가득 찼다.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친구들의 온도만으로도 우리 집은 충분히 따듯하게 느껴졌다. 친구들을 위해 김치볶음밥을 했다. 볶음밥은 내 시그니처 메뉴였으니까.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문제는 이다음부터.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언젠가 '한 사람이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으려면 최소한 7평은 필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이었을까. 세 식구가 살던 집에 고작 사람 두세 명 더 늘어났다고 이리 불편해진 것일까? 공기가 부족한가도 싶고 별생각이 다 들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친구들과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에도 두통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심지어 콧대까지 아파왔다. 인상은 구겨질 때로 구져지고 관자놀이는 지끈지끈, 콧등에서 심박수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쿵쿵쿵-
몸 상태가 급하락 하니, 갑자기 적막함이 그리워졌다. 방안의 불들을 모조리 꺼 버리고 나 혼자 덩그러니 침대 위에 누워있고 싶었다. TV 소리도 시끌벅적함도 없는 적막함 속에 놓여있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이제 그만 돌아가줄래? 라는 말은 끝끝내 머릿속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다들 웃고 있는데 내 얼굴만 점점 죽을상이 되었더니, 그제야 남자 친구가 내 상태를 파악하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어디 아파? 오늘 몸 상태 안 좋은데 무리한 거 아니야? 우리 이제 갈까 봐' 라며 내가 내심 기대한 말을 꺼냈는데, 아니 이게 뭐람? 순간 나는 내 코를 의심했다. 아니겠지 설마. 그런데 정말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내 두통의 원인은 다름 아닌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 입 냄새 때문이네. 입 냄새가 원인이었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하지만 좀 더 읽어봐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분명 남자 친구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얼굴과 가장 먼 곳에 있는 발 쪽에서 괴상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찌나 괴상하고 강렬하던지 그 충격이 쉽사리 가시질 못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서 남자 친구가 던진 미끼를 덥석 잡아 물고는, 몸 상태가 안 좋다는 핑계를 댔다. 내가 초대한 사람들을 내 손으로 집 밖에 내몰았다. 그 순간까지도 강렬했던 그 냄새는 그가 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집안 곳곳에 머물러있었다. 그렇게 하루의 반 정도를 그 냄새와 함께 보내고 나니, 애석하게도 그 남자 친구를 향해 들끓던 나의 감정들이 잠잠해져 버렸다. 뭘 해도 재미가 없었다. 그때 그 괴상하고 강렬했던 경험이 자꾸만 떠올라서 결국 이별을 고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라, 예민한 내 후각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했던 한 사람과 멀어졌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제 그 사람을 떠올리면 괴상하고 강렬했던 그때 그 냄새의 추억만 떠오른다.
그런데 반대로 예민한 후각 덕분에 남자 친구와 좋았던 경험도 있었다. 사실 아홉 살 때 좋아했던 애라 남자 친구라고 말하기도 약간 낯 간질스럽긴 한데. 어쨌든 그 애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반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친구였다. 잘생긴 미남형은 아니었지만 키가 큰 편에 속했고 운동을 잘했는데, 나는 그 애가 그런 것들보다는 개한테서 풍기는 특유의 포근하고 상쾌한 냄새 덕분에 인기가 많은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애가 특별해 보였다. (향수나 섬유 유연제 같은 것들의 존재를 몰랐던 때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애의 향기에 관심이 쏠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애를 좋아하게 됐다. 매일매일 편지를 써서 그 애 사물함에 넣어놓았다. 조금씩 내용은 달랐지만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일관성이 있는 편지들이었다. 그 애의 이모님이 운영하신다는 처갓집 양념 통닭집까지 나의 짝사랑, 사물함 편지 스토리가 전해질 정도였으니, 나는 꽤 오랜 시간 그 아이를 혼자 좋아한 거였다.
그리고 나는 그 애한테서 풍기는 좋은 향기 덕분에 곤란할 수도 있을만한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는데, 그 애가 내 주변 10m 안쪽으로 살짝 다가오기만 해도 금세 알아채곤 했기 때문이다. 그 애는 독보적인 향을 내뿜는 애였고, 나는 독보적으로 후각이 발달한 애였다. 아무리 내가 유치[리]에 사는 시골 촌뜨기였다고 해도 나에게는 분명히 아홉 살의 영악함이 존재했기 때문에, 나는 예민한 내 후각을 무기로 삼아 짝사랑에 십분 활용했다. 그 애가 내 주변에 다가옴을 느낄 때면 난 항상 옷매무새를 가다듬었고, 거울을 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예쁜 표정을 태연하게 지었다. 어쩌다 정말 마주치기 싫은 꼬라지일때는 온 힘을 다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기도 하면서.
덕분에 내 짝사랑은 미완성으로 끝나지 않고 결실을 맺었다. 백 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 없다더니, 그렇게 그 아이는 내 첫 번째 남자 친구가 되었다. 참 순수했던 기억이다. 누군가를 그때처럼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을까. 순수함보다는 현실감각이 돋보이는 나이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쉬운 일은 아닐 듯싶다. 그래도 나는 그 애를 생각하면, 그때 그 설레었던 감정들과 함께 기분 좋은 향기의 추억이 떠오른다.
내 기억 속에 냄새로 기억되는 남자와 향기로 기억되는 남자. 이 둘은 한 끗 차이로 내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