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dentity

나에게도 번역기가 필요하다.

병맛! 술맛? 병×같은 맛..-_-;;

by 시월애

대형 쇼핑몰에 간 적이 있다. 이른 시간이라 한산하여 마음껏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오시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내미신다.

"면도기 사고 싶어요"

외국분이신데 우리나라말을 모르시니 번역 어플을 쓰신 거다. 번역 어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처음 본 나는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번역기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냥 영어로 이야기를 하지만 그분은 영어를 못하시는지 그냥 고개만 저으며 핸드폰을 내쪽으로 내미신다.

"3층으로 가세요"

그러자 핸드폰에서 바로 중국어로 통역을 해줬고 그 남자분은 금세 얼굴이 밝아지시면서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신다.

돌아오는 길 번역기 어플이 신기했던 나는 몇 가지 어플을 다운로드하여서 여러 가지 나라말로 바꿔 들어본다. 그런데 이 번역기 어플 놀이가 꽤 재미있다. 담에 유럽으로 여행 갈 기회가 있다면 꼭 써봐야겠다.



그날 오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A4용지 빼곡히 쓰여있는 영어단어들이 갑갑하다. 어느 날 짱구가 내가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무릎에 앉으며 묻는다.


엄마! 엄마는 왜 영어로 된 것만 봐?
영어로 된 것을 우리나라말로 바꿔야 하니까.
왜?
그래야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으니까.
어른들 중에 영어 모르는 사람도 있어? 어른이면 자기 일은 스스로 해야지 왜 엄마가 해줘?


지금 자기가 한 말이 엄마 밥줄 끊는 말인지 모르는 짱구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서류를 한참 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저 할 일을 한다.


그러다 문득 궁금하다. 눈에 서류가 잘 들어오지도 않고, 요즘 구*이나 네*버 번역기가 좋아졌다는데 이참에 한번 해봐?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 변역사도 없어지는 직업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글을 얼마 전 읽고 덮어버린 적이 있다.



일단 아무리 읽어도 잘 안 읽히는 문장을 입력해본다. 우와! 일단 속도는 무지 빠르다. '빅데이터'라는 게 바로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구나.

그런데 번역물은? 에구 분명 한글로 적혀 있건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다. 이게 뭐야! 하며 창을 내려버리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된다.


아직은 내가 AI보다는 낫는구나! 아직은 밥 벌어먹고 살 수 있겠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게 번역기가 필요할 때가 어디 영어를 한글로 바꿀 때뿐이랴! 아이가 태어나 비록 말을 못 해도 '어' 그 한마디에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어도 엄마는 아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짱구가 말을 배워 자기표현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연히 짱구와 비슷한 개월 수의 아이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둘 다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건데 혼잣말처럼 하니 내가 중간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너희 둘이 직접 이야기하면 안 돼? 왜 내가 4살 아이들 대화를 통역해줘야 해?


그 말에 둘은 빵 터졌고 다른 아이의 엄마가 둘의 대화를 통역해줬다.



엄마가 되어 보니 내 아이의 마음을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뭘 원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짱구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고 있는 걸 알고는 신기해하며 '역시 우리 엄마 최고!'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면 왠지 뿌듯하다. 엄마와 아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번역기'가 있다는 걸 예전엔 몰랐다. 우리 엄마가 가끔 하시는 말씀이 있다.

엄마는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거다.


학교 다닐 때 그 많은 문제집을 사야 한다고 돈을 받아서 친구 문제집 보여드리며 확인받아본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거다. 그 쫄깃쫄깃함을! 왜 나는 그때 우리 엄마가 감쪽같이 모르셨을 거라 자신했을까? 처음 대학 동아리 뒤풀이를 하고 선배들과의 자리에서 술이라는 걸 처음 마셔봤다. 하늘이 빙글빙글 땅이 울툴불퉁 올라온다는 게 뭔지를 경험했던 그다음부터는 선배들도 나에게 술을 권하는 동기들이나 선배들을 오히려 혼낼 만큼 (나한테 술을 먹이는 건 술이 아깝다고...ㅠㅠ) 술이 약한 나는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말짱해 있었으므로 무사통과를 예상했다. 그런데 엄마의 한마디


너 술 마셨니? (우리 엄마는 개코다..ㅠㅠ)
아니.
그런데 왜 술 냄새가 나?
어! 친구가 술을 내 옷에 흘렸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얼토당토않은 핑계였건만 엄마는 그냥 속아 넘어가 주셨고, 난 그 보답으로 술을 입에도 대질 않았다.




그런데 난 요즘 다른 의미의 '번역기'가 필요하다. 예전엔 아재 테스트 같은 거 보며 웃고 선배들을 놀리곤 했었는데 요즘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솔직히 요즘 아이돌은 BTS만 알고 그들의 노래도 짱구가 태권도에서 들은 것을 집에서 흥얼거리며 춤을 추길래 알게 된 것이다. TV를 잘 안 보니 가수인지 연기자인지 어디에 출연했는지 도무지 알지를 못한다. 요즘 내가 잘 알고 있는 TV 프로그램은... 헬로카봇????


예전에 수업을 하다 '급식체'를 배워보겠다고 학생들에게 하나씩 물어본 적이 있다. 여러 개 배우면 잊어버릴게 분명하기 때문에(솔직히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하나씩만 알려달라고 했는데 학생 하나가 오히려 나한테 묻는다.


선생님! 'ㅇㅈ'이 뭔지 아세요?
몰라
한번 맞춰보세요.
아자?
그냥 가르쳐주면 돼지 뭘 물어?
'인정'이요.


그렇게 영어시간에 난데없는 초성 퀴즈가 계속되었고 난 30% 정도 눈치로 겨우 맞췄던 거 같다. 그러다 며칠 전 '90년 대생들이 온다'라는 책을 읽고 다시 한번 혼자 크게 좌절했다.



책 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이라고...

간단함은 알고 병맛은... 요즘 젊은이들은 건강하게 술 문화를 즐겨서 병맛이라고 했나 보다, 그리고 솔직함은 당연히 알고... 이러면서 이 구절을 완전히 이해한 줄 알았다.


그런데....


병맛이 내가 예상했던 건전한 술 문화를 즐기는 90년생이 아니라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나타내는 B급 정서를 극대화하고 조롱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제까지 재미있게 이 책을 읽고 있던 난 뭔가 싶고 서글프기까지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스압', '인싸', '레알' 이런 신조어들이 나올 때 까지는 '그래! 아직 죽지 않았어.' 하며 행복하게 읽었건만 아니 무슨 '병맛' 이 두 글자에 이렇게 많은 의미를 내포하냔 말이다.


이런 나에게 그리고 나와 같은 좌절감을 느끼며 아재라고 놀림을 받고 있는 모든 70년대생, 80년생분들을 위해 '번역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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