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현 Mar 10. 2024

어깨

‘누군가 잠시 어깨를 빌려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출근길 혹은 퇴근길이었다. 지하철 자리는 가장 끝자리나 창문턱이 있는 곳이 아니면 마음 편하게 머리를 기댈 곳이 없다. 그런데 사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는 누군가의 어깨를 빌린다는 건 썩 내키지 않는 발상이다. 그 모습이 마치 포식자로부터 언제 사냥당할지 몰라 불안함에 떨고 있는 톰슨가젤 같다고 느껴진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많고 많은 동물 중에 톰슨가젤이지? 나는 가물거리는 눈을 온전하게 감지 못하고, 귀는 지하철 안내 방송에 쫑긋 세우며 아득한 정신 속에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때 방과 후 컴퓨터 수업을 하면, 나는 언제나 남들보다 빨리 마무리했다. ‘주타이쿤’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 마음대로 동물원을 짓고 부술 수 있는 속성이 좋아서 그 게임을 켤 때마다 설렜다. 오늘은 어떤 컨셉으로 동물원을 만들까? 남은 20분 동안 얼만큼 완성될 수 있을까? 이렇게 늘 간질간질한 마음에 화장실에 가고팠고, 정말 화장실에 들르고 난 후 게임을 켰다.


물론 모든 것들이 순수하진 않았다. 관람객들이 불만족 의사를 내비치거나 혹은 사육사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 동물들이 병에 걸리면 동물원의 가치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손님의 발길이 끊기고 입꼬리가 처진 붉은색 이모티콘이 군데군데 보였다. 마침 선생님도 이제 컴퓨터를 끄라는 지시를 하신다. 그러면 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울타리를 마구 부쉈다. 특히 호랑이, 사자 등 사나운 동물이 있는 울타리부터 먼저 부순 후, 손님을 마구 공격하는 장면을 지켜봤다. 안내 문구에는 ‘사자(7)이 관람객(35)을 공격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쉴 새 없이 떠오른다.


어느 날은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게임을 담은 CD를 받았다. 집에서는 저장이 가능한 그 게임에 더욱 애착을 가졌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질려버리면, 울타리 하나를 지어서 톰슨가젤 수십 마리를 넣고, 호랑이나 사자를 그 속에 넣었다.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공격하는 걸 구경하는 잔인한 나, 그리고 낮은 그래픽 픽셀 속에서도 보이는, 불안에 떨고 있는 살아남은 톰슨가젤 8마리.


나는 벌을 받았구나- 생각했다. 그때 하도 게임 속 동물들을 괴롭혀서 내가 이제 현실판 톰슨가젤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상경한 뒤, 마음대로 꾸벅 졸았다가 옆 사람의 따가운 눈초리를 몇 번 받은 뒤 자는 도중에도 긴장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 정류장에 내리면 어깨와 목이 뻐근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본 적이 없다. 가족 사이에도 그랬다. 주로 아버지 차를 타고 이동할 때에도, 어깨가 필요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는 차 뒷좌석에서 대자로 쫙 뻗고 누운 적도 있었고, 동생이 태어난 후에는 창문이나 안전벨트에 기대어서 아무 걱정 없이 잠들었다. 할머니 집에 다녀오거나 나들이를 다녀온 후, 양 입가에 침을 한가득 머금은 채 잠들었다가도 집 주차장에 다다른 익숙한 코너링이나 방지턱을 넘는 덜커덩 느낌이 들면, ‘아, 집에 다 왔구나’라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우리 집에서 가장 덩치가 커져서, 내가 머리를 턱 하고 놓기엔 동생이나 엄마의 어깨는 너무 조그마하다. 그렇다고 아버지한테 기대자니 아직은 조금 어렵다.


그렇다고 아무리 졸려도, 여자 친구들 어깨를 쉽사리 빌린 적이 없다. 어색했다. 무엇보다도 마음 편하게 기댈만한 친구를 못 찾았다. 그래서 어릴 때에도 스킨십을 쉽게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정말 20살이 되기 전에는 누군가의 어깨에 머리를 뉘어본 적이 없다.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에 가깝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후, 체력은 갈수록 고갈되고 그만큼 머리도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걸어 다닐 때조차도 왜 이렇게 무거운지, 자꾸만 하늘보단 땅을 보게 되는 머리통 속을 씻어서, 한없이 가볍게 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통수단만 타면 꾸벅꾸벅 졸기 십상이고, 뭉툭한 창틀에 머리를 찧어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유일하게 마음 놓고 기댈 수 있었던 어깨는 주로 연인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긴 변명이었다. 사실 연인이야말로 내가 머리를 합법적으로 기대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최고의 상대다. 가족보다 편하고 친구보단 덜 부담스러운. 그래서 몇 번의 이별 후 혼자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버틴 채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자면, 그 사람은 모르겠고 어깨만 유일하게 떼오고 싶었다.


그럼, 이쯤 되면 나에게 반문한다. 너는 정말 살면서 누군가에게 어깨를 쉽게 내어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칭얼거리면서 남이 실수라도 잠시 내 어깨에 기댔을 때,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다. 분명 예전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 나이를 먹어가며 더 그렇게 마음속 여유가 좁아지는 듯하다.


어느 날, 퇴근길에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졸다가 그만 나에게 기댄 적이 있다. 그날은 나도 회사에서 많이 고되었던 터라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고 있자니 곧 폭발 직전인 2호선에서 유일하게 나와 그 아이 자리만 고요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고등학교 때 만약 아버지 차가 아니었다면,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한가운데서 널브러져 잠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며칠 전, 차가운 지하철 손잡이 봉에 기대어 그런 생각을 했다. 톰슨가젤과, 수험생 여자아이와, 스쳐 지나간 연인들과, 조그마한 엄마와 동생의 어깨와, 한 번도 기대어 본 적 없는 아빠의 어깨를 떠올리며, 필요한 사람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 자율 어깨 대여제가 필요하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