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방학은 유난히도 길었던 것 같아.”
개학 전날, 한숨과 안도가 뒤섞인 엄마의 촌평에 두 아이들은 펄쩍 뜁니다.
“너무 짧아요.”
이구동성 외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차이가 있습니다. 방학기간 동안 이것저것 욕심을 부려 쫓아다녔던 큰 녀석은 27일의 방학기간이 절대적으로 아쉬웠을 터이고, 아무것도 안 하겠다 선언하고 뒹굴던 작은 녀석은 37일간의 방학 동안 꽤 심심했을 것입니다.
큰 딸아이는 귀도 얇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분기별로 새로운 방과 후 프로그램 신청서를 들고 오며 흥분하곤 했습니다. 쉽게 달아오른 만큼 쉽게 식긴 합니다. 한 가지를 오래 꾸준히 하지 않는 모습에 걱정을 한 적도 있지만 낯선 것에 쉽게 다가가는 태도를 장점으로 받아들인 후부터는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편입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주춤하다 했더니만 2학년이 되고 좀 여유가 생겼나 봅니다. 방학하기 훨씬 전부터 방학하면 이걸 하겠다, 저걸 하겠다, 하고 싶은 것들이 쌓이고 쌓입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은 급속도로 말이 많아집니다. 저는 웃으며 딱 한 마디만 합니다.
“잊기 전에 얼른 적어 둬라.”
방학식날, 가득 적혀있는 목록을 보며 나름대로 고심을 하고 엄마의 의견도 슬쩍 물어보더니 몇 가지를 골랐습니다. 방학이면 참가하던 독서캠프 대신 NIE(신문 활용 교육) 프로그램을, 그리고 한자급수반과 농구교실을 신청하겠다고 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던지 고민하던 사진 배우기는 인터넷으로 대체하고 이번 방학엔 피아노는 안 하겠다고 합니다. 2주간은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한 주는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며 놀고 마지막 한 주는 푹 쉬겠답니다. 생각보다 학구적이고 짜임새 있는 선택에 저와 남편은 내심 놀랐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한낮엔 아직 무더위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 더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은 더위쯤은 우스워 보입니다. 끝나버린 방학을 아쉬워하는 큰 아이와 지난 한 달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호기심에 신청했던 NIE 프로그램은 글을 많이 쓴 것 같아 뿌듯했고, 농구는 슛하는 실력이 늘고 함께 참가한 친구와도 재미있어서 만족스럽지만 찜통 체육관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자급수반은 여섯 번의 수업을 듣고 조금만 시험 준비를 하면 누구나 준 3급 자격증을 딸 수 있다고 하신 한자 선생님 말씀을 듣고 신청했는데, 기출문제를 푸는 수업에 많이 실망한 눈치입니다. 자신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자격증 시험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자격증을 따면 뭐하려고 했냐고 물어보았더니, 진학에도 도움이 되고 나중에 취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혹했답니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것저것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앞으로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사진은 직접, 많이 찍어보면서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 찾아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별로 많이 찍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싶다고, 사진 찍기를 배우고 싶다고 오랫동안 노래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약해진 반응입니다. 카메라만 사주면 매일 들고 다니며 온갖 것들을 찍을 거라 기대했던, 큰 맘 먹고 카메라를 선물한 부모 입장에서는 꽤 서운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마음을 다스려 봅니다. 여차하면 내가 더 많이 사용하겠다는 속셈도 있으니 아까워하진 안으렵니다.
가족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네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연극을 보았고 할아버지 댁, 외할머니댁, 그리고 이모네도 다녀왔습니다. 강릉과 속초로 가족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엄마 숙제인 안과와 치과 검진도 해치웠습니다. 워터파크에서 마지막 불꽃놀이까지 보며 놀았고, 벼르고 벼르던 만화카페에서도 하루 종일 뒹굴며 만화책도 보았습니다. 아이 덕분에 저도 강경옥 작가의 작품을 몇십 년 만에 다시 보며 즐거웠습니다.
방학 기념(?)이라고 꼬여서 떠넘긴 영어문제집은 거의 하얗지만, ‘너무 짧긴 했지만 방학 동안 잘 놀았으니, 2학기 때 열심히 하겠다’는 아이의 말로 엄마는 위안을 삼아야겠지요. 글로 쭉 적어보니 아이도 저도 방학을 즐겁게 꽤 잘 보낸 것 같습니다.
“만약 1년의 시간이 아이들에게 주어진다면 내 아이가 무엇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비슷한 나이와 환경 때문인지 어른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총 20명의 부모 중 13명이 1순위로 해외여행을 꼽았습니다. 엄마, 아빠 모두 자녀의 성별과 관계없이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길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희망하는 나라와 여행의 형태는 조금씩 달랐지만 큰 테두리는 비슷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희망하는 직업도 경험하는 등 사회체험을 하면서 진로나 미래에 대해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부모가 5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그 외 자연 속에서 살아보기, 악기 같은 취미를 기르기를 대답한 부모가 각각 1명이었습니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고 답한 아빠도 있었고 고전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엄마도 있었습니다. 물론 해외여행도 하고 사회체험도 했으면 하는 저처럼 두 가지 이상을 꼽은 부모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기간을 조금 줄여 다시 물었습니다.
“한 달이 주어진다면 아이가 무엇을 하면 좋겠어요?”
한 달간 국내 여행을 꼽은 분이 7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역시 해외여행, 5명이었습니다. (일 년이든 한 달이든 해외여행을 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부모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 사회체험 2명, 취미 기르기 1명이 있었습니다. 부모(본인이겠죠?)의 간섭이 없는 완전한 자유생활-먹는 것, 자는 것, 책 읽는 것, 게임, 운동, 씻기 등 생활 모든 영역에서-을 주고 싶다고 대답한 분도 있었답니다.
열 명의 여학생들은 일 년이 주어진다면 세계일주(3명), 해외여행(3명), 영국 여행(2명), 미국 가기, 일본 가기, 해외 봉사, 바다 가기, 맛 집 찾아다니기(2명), 그림 그리기, 아이돌 만나기, 드럼 배우기, 소설 쓰기, 사진 찍기 등을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물어보았을 때는 아이돌 콘서트나 팬 사인회를 가고 싶다는 대답이 5명, 우리나라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답변이 4명으로 비슷했습니다. 캠핑카를 타고 다니고 싶다는 아이와 도보와 자전거로 국토순례를 하고 싶다는 아이처럼 구체적으로 대답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연예인만큼 웹툰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한 달 동안 애니메이션 정주행(1회부터 끝까지 쭉 보는 것)을 하겠다는 아이들도 3명이나 되었습니다.
부모와 아이의 대답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여행을 가장 많이 권하고 또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좀 더 들어가 보면 미묘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부모들은 다양한 경험을 하고 넓은 세상을 보면 자녀의 장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행을 통해 철도 들고 공부 동기도 생기지 않을까 기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여행을 원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일상의 탈출입니다. 학교-학원-집, 매일 되풀이되는 쳇바퀴를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짧은 짬을 내어 웹툰을 보고 게임을 하는 현재의 생활이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설레지 않으시나요? ‘낯선’이란 단어가 좀 부담스럽다면 ‘새로운’ 은 어떤가요? 새로운 장소,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확실히 매력이 있지요?
그러나 반드시 멀리 떠나야만 새로움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움’이란 ‘다름’과 동의어입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수만 있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 늘 보던 사람들과도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일상의 패턴을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지루했던 일상에 새로운 매력을 더하는 일입니다. 그 새로운 매력은 삶을 풍성하게 하고 윤기 있게 합니다. 더 잘 살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오마이 겐이치는 사는 곳을 바꾸거나 새로운 사람을 사귀거나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이 세 가지 방법만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길고 먼 그리고 비싼 여행보다, 주어진 시간을 다르게 사용해 보는 것이 부모에게나 아이에게 훨씬 쉬운 방법입니다.
한 달.
길지 않지만 절대 짧지도 않은 시간입니다. 매년 두 번씩 주어지는 방학. 이번 여름 방학은 아이와 함께 어떻게 보내셨나요?
“아이에게 일 년이 주어진다면 전기가 안 통하는 시골에서 6개월 살고, 3개월은 국내 도보여행, 2개월은 외국 여행, 그리고 마지막 1개월은 아무것도 안 하기... 한 달이 주어지면 외국에 가서 살게 하기”라고 말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마지막 코멘트는 "이건 내 희망 같네!"였습니다.
되풀이되는 하루하루와 무거운 일상에 지친 부모와 우리 아이들. 내가 바라는 나의 시간과 아이가 바라는 아이의 시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공감한다면, 방학이 '전쟁' 보다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