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안전한 돈 관리.
내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하는 직원이 알려준 사실 하나는 시도 때도 없이 자금이체를 한단다.
놀랍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재택 하는 날에는 OTP를 가져가서 하기도 해야 한단다.
놀랐다. 그럴 수가 있나?
입사하자마자 인증서도 받았고, OTP도 받았다.
직원이 퇴사했으니 뽑기 전까지는 혼자서 자금이체도 하고 회계처리도 해야 한단다.
원래 있던 팀원은 퇴사한다니까. 나 혼자 다하라네?
매일 통장잔액을 체크하시지도 않으니까, 잠시 소액만 빌려 쓰고 되돌려 놓으면 아무도 모르겠지.
이렇게 생각했다면 횡령이 시작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횡령 사건의 처음은 대부분 소액, 잠깐 쓰고 되돌려 놔야지 한다고 하니까.
다행히 나는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론 돈이 당연히 많으면 좋지, 그렇지만 내 인생을 걸만큼 가져갈 돈이 회사에 많지도 않았고
고작 몇 푼(?) 남의 돈을 탐내며 내 인생 망치고 싶은 사람도 아니다.
나는 욕심 없기로 유명했다고, 비록 우리 집에서만 알아주는 거였지만.
여기서 빛을 발하게 되다니. 들어는 봤나 내부회계관리제도?
회계팀이라면 들어봤을 테고, 회계팀이 아니라도 상장기업에 다녔다면 들어봤을 텐데.
회계처리가 되기까지의 프로세스를 검증하고 리스트를 줄이는 구조 혹은 절차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꽤 귀찮고, 이렇게까지 왜 해야 할까 싶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유명 금융그룹 주요 계열사에서 내부회계관리제도를 총괄하는 담당자였다는 자부심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든 일에 과정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고 한다.
투명하지 않은 프로세스에서 투명하고 신뢰성 있는 재무제표가 나올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중에서도 자금. 돈과 관련된 일련의 모든 과정.
돈을 관리하는 것은 회사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일이다. 회사는 결국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나는 참 믿음직스럽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다.
근데 그건 내 생각이고, 회사입장, 회사에 투자하는 주주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다.
고작 입사 며칠된 담당자 한 명을 뭘 믿고 OTP며 인증서며 다 주고, 회계도 혼자 다하라는지.
아무리 스타트업이라도, 내부회계관리제도 같은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안다. 이건 위험하다.
혼자지만, 최선의 구조와 프로세스를 만들어야 했다.
엄밀히는 내 상사인 C레벨이 있었다.
그분을 활용한다.
이체는 결코 나 혼자서 하지 못하도록, 한 명은 등록하고 한 명은 승인하는 다단계 프로세스를 등록했다.
금고를 샀고, OTP는 별도 금고에 보관한다. 이체가 필요하면 출근해서, 금고에서 OTP를 꺼내서 이체한다.
그러려면 매일 수시로 이체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이체하는 날을 지정해야 한다. 지정하면 되지.
자회사까지 다 바꾸고 팀원이 들어와서 회계도 더 분리하고 나니까, 그제야 나 스스로도 마음이 놓였다.
사실 되게 별거 없는 소소한 프로세스의 변경인데, 그 의미를 그렇지 않다.
모든 일을 혼자서만 하지 않는 것. 어쩌면 회사일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모두 그 리스크를 안다 최소한 휴가를 가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나를 대체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자금도 매한가지. 혼자 할 수 없다.
특히 혼자 업무를 한다면 회삿돈을 가져가 버릴 위험도 있으니 더더욱 혼자서만 할 수 있도록 두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빠르고 유연한 프로세스가 필요한 스타트업이라지만, 유연성을 위해 안전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