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첫날 도입한 ERP
9시에 출근했다, 입사첫날이니까.
출근해서 어리둥절, 직속상사와 인사하고 내 업무와 관련된 일부 자료를 넘겨받았다.
좀 의아했던 건, 재무담당자가 있는데 직속상사가 회계감사를 받았다고 감사보고서와 관련 자료들을 주셨다. 이때 팀원이 퇴사할 예정인걸 눈치챘어야 하는데!
우선은 별생각 없이 넘어가고 HR 팀장님과 대망의 연봉 계약서를 쓰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 먹고 나른하게 좀 멍 때리다가 퇴근하는 줄 알았는데, 외부미팅을 해야 한단다. 명함도 없는데.
우물쭈물 들어간 미팅은 ERP 업체였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받은 계약서. 이미 도입하기로 구두합의기 된 상황이라 빠르게 계약서 날인해달라거 하신다. 그리고는 상사는 힘내라고 파이팅 해주셨다. 허허허.
시스템을 신규로 도입한다는 말은 곧 업무 프로세스를 바꾼다는 얘기다. 그리고 많은 상장 기업에서 이미 사용을 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곧 상장기업에게 요구되는 프로세스를 갖추기 적합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ERP는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이 상장하기 전후로 많이 도입을 한다.
상장을 한다는 것은 정보를 공시한다는 큰 의미를 가지는데, 공시 자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재무정보이다. 그러기에 상장은 재무팀의 업무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치는 게 많다. 정확하고 신뢰 가는 재무정보를 시장의 공시규정에서 정하는 일정에 맞춰서 외부 회계법인의 검토나 감사를 받고 공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정확하고 신뢰 가는 재무정보"라는 모호한 말은 결국은 투명하고 체계적인 결산 프로세스를 만들고 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절차로 많이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ERP 도입.
ERP를 도입하게 되면 특히 사내에서 여러 방향으로 하던 의사소통이 전자결재라는 하나의 형태로 취합될 수 있고, 영업관리부터 재고관리, 자금관리 및 회계업무까지 한 번에 시스템에서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ERP는 권한관리, 승인체계 등이 기본적이 갖추어져 있어서, 설정만 잘해놓으면 상장회사에 걸맞은 프로세스로 정리할 수 있다.
ERP를 도입할 때 가장 허들은 사실 왜 이게 필요한지를 경영진에 설득하는 일인데, 이미 대기업에서 ERP를 주야장천 쓰시던 C레벨들이 많아서 이건 쉽게 넘어갔고, 합의도 완료된 상황이라 특별한 허들이 없었다.
ERP의 유용성과 장점들은 비단 상장회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회계 기장만 하는데, 재고관리, 영업관리, 물류관리 등의 시스템을 같이 사용하고자 하는 니즈가 있다면,
메일로 의견조율하고 소통을 주로 하는데 담당자가 갑자기 퇴사하면 히스토리 관리가 안 되는 문제가 있던가, Flex로 전자결재를 하고 자금이체 하는데 이체 누락이 발생하거나 회계전표 누락이 발생하여 전자결재와 재무, 회계시스템을 연동하고 사용하고 싶은 니즈가 있다면,
상장사는 아니지만 상장사 수준의 내부 프로세스를 갖추고 싶다면
ERP를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 볼 수 있다.
결국 나는 입사 다음날에 더존과 계약서 날인하고, 바로 도입 일정을 세워서 관련 팀과 논의했다.
어색했던 입사초반 영업관리, HR 등 관련 팀이랑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도와준(?) 일이고, 일상적인 업무들을 해야 하는데 팀원은 퇴사해서 새로 뽑으랴, ERP를 도입하랴 정신이 없었다. 입사초기에는 원래 '이 회사를 계속 다녀도 될까?' 하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정말 생각할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없는 입사 직후 3개월, 수습기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