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남자였으면 너 안 낳았다

feat. 언니가 남자였으면 너 안 낳았어

by 송시원

제목인 '누나가 남자였으면 너 안 낳았다'는 나의 남동생이, 부제인 '언니가 남자였으면 너 안 낳았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가족 내 위치와 우리 집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나는 딸-딸-아들로 구성된 삼형제 중 둘째이자 차녀이다. 언니와 남동생이 있는 끼인 샌드위치 햄이나 양상추정도 된다. 단순히 이런 구성이었다면 내가 저말을 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어느 집성촌 종갓집의 장자이고 어머니는 그런 장자와 결혼했다. 우리 집은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이 필요한 집안이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고추달린 손자를 강조하지 않았다지만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눈에 띄게 좋아하셨다는 말이 있다. 무슨 쌍팔년도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 언니는 1999년, 나는 2003년, 동생은 2004년에 태어났다. 2000년대 초반에는 남녀 차별하고 그런 거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났어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고 알리고 싶었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그거 옛날에나 있던 일인데 너가 어디서 보고 가짜로 지은 이야기라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저 말을 들을 때면 당연히 상처를 받았지만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누나가 여자여서 네가 태어난 거니 누나한테 잘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그거 애매한 동의만 표했고 나중에는 무시했다. 성장하고 난 후 저말을 듣거나 생각하면 그래도 낙태를 안 해서 다행이다, 물질적으로 해줄 만큼 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엄마아빠가 쓰레기고 너무하다라고 느꼈다면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쓰레기라고 말하기에 아까운 사람들이다. 최선을 다해서 부족함 없이 키웠고 아들은 대학 보내고, 딸은 대학 안 보내는 게 아니라 모든 아들딸을 대학 등록금부터 취업 준비까지 지원하고 계신다. 일상에서 소소하게 발생하는 차별들은 그냥 더 좋아하는 자식이 있어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넘겼다. 중간에 말은 이상하게 해도 결과적으로 내가 부모님한테 받을 만큼 받았기 때문에 저 말을 가지고 딴지를 거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말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왜 지금까지 저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하나의 단면만 보고 판단하기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딸-딸-아들 조합의 남매를 보면 둘째 딸이 상처 받고 자라지 않을지 걱정이 되고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모르겠지만 아들 낳으려고 노력했다는 생각까지 한다. 딸부잣집에 막내 아들인 집이라면 집안 어른 중 누군가가 지독하게 아들을 원했고 그 집 남자는 왕자처럼 컸겠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그 집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틀릴 확률이 매우 높은 추론이다. 그냥 내 경험상 딸이 앞에 많이 있고 막내가 아들이면 그럴 거 같다고 마음대로 단정지어 버리는 거다. 어느날 친구와 대화를 하다 딸딸아들은 중간에 끼인 애가 너무 힘드니 굳이 셋 낳을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는데 유독 가족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저 말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내가 저 말을 싫어했던 이유는 나를 낳으려고 낳은 게 아니고 아들을 낳고 싶어서 싫었다. 나는 딸이기 때문에 평생 부모님과 할머니가 원하던 그 아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저거 하나지만 살다보니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리고 낙태하고 태어나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고 어쨋든 낳았으니 과거는 묻자고 생각했다. 이런 평면적인 논의에서 나아가지 못해서 제미나이한테 물어봤다. 질문은 물질적인 지원을 많이 받아서(남동생보다도 많이 받았다) 실질적인 차별이 없는데 왜 저말이 내게 상처가 되는지, 그리고 나의 부모는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할까이다.


내가 왜 저말에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한 제미나이의 답변은 저 말이 나를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상처라고 했다. 결과인 사람은 그 사람을 얻기 위해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대체불가능성을 획득하지만 그 결과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사람은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한다. 나는 탄생에서 과정이라는 본질이 나의 실존에 앞섰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 말은 칸트의 사람을 항상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과 연결된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칸트의 정언명령과 수단 아닌 목적을 배웠을 때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외우기만 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수단으로 대해지는 삶을 겪자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것이 사람을 상당히 망가뜨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란 존엄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구로 다뤄지는 순간 모멸을 느낀다.


그리고 정말 궁금했던 왜 나의 부모는 저 말이 상처가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말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부모가 나에게 악의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냥 몰라서 그랬다고 한다. 부모는 이 말에 내가 상처입을 것이란 걸 알기 전에 아들을 낳기 위한 무용담을 풀고 싶은 욕망이 큰 사람이다. 집성촌 종갓집의 장자와 그의 아내인 맏며느리에게 아들 낳기는 인생의 과제였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만해도 일년에 제사가 11번 있었던 집이고 딸을 2명 낳은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할머니도 은영 중에 아들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둘째 딸인 나의 탄생은 그들의 서사 속에서 가장 큰 위기이자 절정 전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일 년 후 동생이 태어남으로서 서사는 절정을 맞이하고 대를 이을 아들을 마련했다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들 인생의 큰 숙제를 끝냈고 이를 자랑하고 싶고 그 서사를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서 나의 탄생을 과정으로 만드는 것은 이야기 진행자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가끔 부모님이 이 말을 꺼낸 후에 조금 미안하지만 할머니도 동생이 태어나고 좋아했다는 말을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나를 키워서 나는 부모님보다는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부모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할머니라도 나를 좋아하니 괜찮다는 입장이였다. 부모님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기어코 할머니까지 언급하면서 본인들의 서사를 더 멋지게 꾸미고 싶을 뿐이었다.


나를 상처없이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상처가 많이 있었다. 메꿀 수 있는 결여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풀 수 있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