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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왑 Jan 15. 2020

기다리고 계십니까?

아주 늦은 감상문 "봄날은 간다"


2001년 가을에 개봉한, 봄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영화.




    첫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때,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막연하게 상상해본다. 누군가가 보고 싶지만, 그 사람도 나를 보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 그때.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할까라는 막연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는 그 순간. 가끔은 설렘이 물밀듯이 오더라도 대부분 혼자 좌절하고 실망하는 그 시절. 일말의 가능성에만 주목해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사랑의 시퀀스를 통찰할 수는 없다. 내가 상상한 그 찬란한 나날이 오지도 않았는데, 그 이후 다가올 불가피한 엔딩을 그려볼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희망찬 상상의 날개 속에 언젠가는 그 희망의 불씨가 불쏘시개를 만나 활활 타오르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상우의 사랑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가올 지질한 날들은 전혀 생각도 못한 채...


봄날은 아직 오기 전이나 명대사는 이미 나왔다

 

   이 영화는 연인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을 차례대로 풀어가면서 사랑의 과정에 주목한다. 주인공은 상우와 은수, 두 사람처럼 보이나 사실상 상우라는 한 남자가 사랑을 하면서 겪는 감정을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깝게 풀어가고 있다. 자연의 소리를 수집하고 있어서인지 아님 시골 청년처럼 수더분하게 묘사되고 있어서인지 남자 주인공은 매우 순수한 모태솔로(?)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그러던 청년에게 세련된 외모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라디오 방송국 PD 커리어우먼인 은수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은수도 상우에게 어느 순간부터 매력을 느끼고 그 희대의 명대사와 함께 불꽃 같이 타오르는 사랑이 시작된다.


라면 먹을래요?


봄날에 라면을 맛있게 끓여주면 나오는 표정이랄까...


    고즈넉해 외로울 듯한 밤, 그녀의 전화로부터 시작된 상우의 설렘은 라면이라는 매개체와 함께 영화 초반부를 흠뻑 지배한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걸리는 시간이 마치 라면 한 그릇 끓이는 시간 정도인 마냥 한 걸음에 달려오는 그 모습이 결정적이다. 분명 은수도 사랑을 하고 설렘을 느끼고 있을 것이지만 그 크기는 그리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말년의 묫자리를 희망하는 한 대사 정도 말고는 모조리 상우에서 투영된 설렘이 불균형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문에 자꾸만 주인공들의 설렘의 무게를 저울질하게 했고, 불균형적인 이 무게감이 직감적으로 나쁜 종말을 상상하게끔 한다. 이러한 직감은 가끔 틀릴 만도 하지만, 이와 같은 명작에서는 예외가 없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끝나는데 명대사는 안 끝난다


    은수의 모습을 반추할 때 그녀가 했던 말들, 행동들이 상우만큼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은수의 전적을 고려해보면 그것들을 그리 안 좋게만 볼 것은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그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간절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설렘의 무게를 얼마나 덜어내고 싶었겠는가. 사랑의 일대기를 경험해봤기에 그 설렘의 종착점이 그 누구보다 잘 보일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상우를 보고 용기를 내서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를 버리고 현실적인 면을 고려한 환승(?)을 하는 모습이 괘씸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엔 결국 자신에게 용기를 준 상우를 다시 찾아오는 모습이 애잔함과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상우에게 화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처럼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는 사람일수록(나는 안 그러고 싶은데…) 이 영화 속 인물에 대한 감상은 복합적이라고 한다. 순애보가 아니기에 “나쁜 여자”처럼 보이는 은수마저 단일한 감상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면서 사랑의 주체임에도, 감정의 흐름이 주로 유추의 대상이다. 따라서 해석에 따라 영화가 풍기는 정서의 폭이 무한히 넓어질 수 있는 영화의 여백의 미를 담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영화를 온전히 소화해 보려면 불친절하게 묘사된 은수의 감정에 주목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만약 은수에 대해서도 충분한 감상이 생겼다면, 이제는 영화에서 주인공 다음으로 자주 나오는 그 인물에 주목해보는 것은 어떨까? 상우와 은수 두 사람의 두근거림, 사랑, 이별 등 매 장면의 뒤엔 항상 이 인물이 나온다. 바로 상우의 할머니다. 젊은 남녀의 사랑을 통찰하는 영화에서 나이 든 노인의 역할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할머니의 모습이야 말로 우리가 평범한 순간 접하는 사랑의 모습과 설렘의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 나이가 지긋이 든 인물이라서 매 순간순간 영화 속 장면에 대해 암묵적으로 교훈을 던져주는 느낌까지 든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이 영화 “봄날은 간다”와 같이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를 보고서도,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이유를 그녀는 감히 제공하고 있다.


수색역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상우와 할머니


    상우의 할머니는 영화 첫머리부터 수색역에서 자신의 남편을 기다린다. 하지만 상우의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셨기에 할머니의 기다림은 부질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는 계속해서 오지 않을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할머니는 대부분의 것을 점차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계시지만, 딱 하나 사랑의 존재와 그 대상만큼은 고이 간직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할아버지의 옛 내연녀가 집에 나타난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일같이 보는 사이도 가물가물 하던 할머니는 생전에 몇 번 보지도 않았을 것 같은 내연녀를 문전박대해버린다. 머리의 능력이 감퇴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는 이러한 장면들.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것이요, 사랑에 대한 상처는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라는 게 실감이 되는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또 한 번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마지막에 펼쳐진다. 치매에 걸린 당신께 한 번도 모진 소리 하지 않던 손자가 이별에 아파하는 그 순간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상우가 소리를 지르지만, 그 말의 귀결은 분명 상우 자신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할머니는 짐작했던 것 같다. 치매에 걸리셔서 제대로 된 말씀 한 번 않던 할머니는 그런 상우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달하며 생을 마무리하신다. 영화의 전개상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이질감을 느껴 불쾌했을 관객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사랑의 희로애락을 모조리 경험했기에, 그 말씀은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와 여자는 떠나면 잡지 않는 거야...


집에서 서로를 마주한 상우와 할머니




나이와 상황에 따라 사랑에 대한 느낌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이, 상황 등 모든 것을 불문하고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요, 기다리는 것은 설렘을 준다는 그 이치를 이 영화는 매우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의 과정이나 끝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그 씁쓸한 현실도 이 영화는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씁쓸한 모습을 젊은 커플과 노인의 모습에 조화시켜 아름답게 서술한, 가히 변장의 극미(極美)가 담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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