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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탐방 프로젝트] 극작가편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숲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기만의 숲을 찾아가는 이야기, 숲탐방 프로젝트

- 극작가편 - 




본 편은 인터뷰이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은 삭제하거나 각색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인터뷰이를 지칭하는 '그'는 삼인칭 대명사로서 특정한 성별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야기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혼자서든, 여럿이든 인간들은 상상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가운데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이 이어진다. 이야기는 때때로 집단을 결속하게 하기도 하고, 신념이 만들어지게도 한다. 그런 인간을 우리는 이야기하는 동물, '호모 픽투스(homo fictus)'라 부른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그 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살고 있을까. 데뷔한 지 5년차가 된 극작가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건 이야기 아닐까요. 적어도 이야기가 제 인생은 구해줬어요. 좋은 이야기들이 저를 계속 살아있게 만들었거든요. 어떤 방식이든지, 어떤 플랫폼을 통해서든지 이야기는 계속해서 필요한 것 같아요. 이야기는 우리가 왜 살아야 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거든요. 그 이야기를 담은 게 저는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예술이 멈춰서는 안 되는 것 같고요. 이야기는 집요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어려운 시기에도 계속 들려질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우리에겐 어떤 시기를 버텨나갈 힘이 생길 테니까요."


이야기가 인간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는 그의 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구해왔을 거다. 이야기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원래 꿈은 영화감독이었어요. 학창시절에 시험 끝나고 학교에서 영화를 틀어줬는데, 그게 <빌리 엘리어트>였어요. '이거다'라는 확신이 머릿속에 들었고 막연하게 '이런 영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영화 시나리오를 쓰려고 극작과에 진학을 했어요. 그런데 당시에 학과에는 '연극이 예술의 기본'이라는 분위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영화 시나리오나 드라마 수업보다 연극 수업을 더 많이 듣게 되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희곡을 쓰게 됐고, 쓰다보니 어느새 희곡밖에 못 쓰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는 겸연쩍게 웃었다.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겠다던 아이는, 세월이 지나 희곡을 쓰는 극작가가 되었다. 물론 순탄하게 극작가가 덜컥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매 순간 선택을 반복하며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같은 과 친구들이 방송작가의 길을 많이 택했어요. 저도 당연히 방송 쪽으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친구들이 불합리한 일들을 겪는 걸 보니 선뜻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졸업하고 좀 쉬었어요. 쉬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극을 해봤다가 그만뒀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게 무조건 한번 해보자고요. 학교 다니면서 희곡을 그렇게 쓰고 연극 작업을 했었는데, 졸업해서 그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고 포기하기가 뭔가 쑥스러운 거에요. 어디가서 부끄럽지 않게 일단 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극단에 들어갔다. 글을 쓰던 그였는데, 극단에서 맡게 되는 일들은 대중이 없었다. 의상스탭을 맡다가 조연출을 하기도 하고, 다시 소품스탭을 하기도 했다.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일들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이곳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무엇보다 아무도 그를 창작자로 봐주지 않았다. 그는 극단을 나와 잠시 업계를 떠났다. 그러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창작지원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그렇게 긍정적인 인간은 아닌데요, 적어도 '내 이름으로 쓴 작품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소원은 이뤄졌으니까요. 요즘엔 작품을 더 잘 쓰고 싶어져요. 좋은 이야기들이 워낙 홍수같이 나오는 시대잖아요. 도태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올라올 때도 있어요. 그래서인지 '무사히 끝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해졌어요. 5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렇게 제가 달라졌네요."


그는 '달라졌다'고 말했지만, '성장했다'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무언가 시도해보기라도 하자던 대학생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더 잘 써내고 싶은 극작가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의 힘이 점점 더 강해졌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서 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은 소망이 읽혔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권하고 싶은 직업은 아니에요. 창작하는 사람들은 다 공감할 거에요.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써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신기한 일이나 새로운 경험을 하려고 감각이 항상 곤두서있는 것 같아요.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 소재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어느 순간 미안해질 때도 있어요. 그래도 다음 순간에 또 모든 걸 소재로 보고 흡수하려는 저를 발견해요.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고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 희곡을 쓰는 것만으로는 돈을 많이 벌지 못해요."


한때는 그도 '돈 되는 글쓰기'를 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글쓰기 수업을 전전했다. 플랫폼 산업이 성장하면서 숏폼(short-form) 콘텐츠가 힘을 얻는 시대가 되었고, 바이럴이 잘 되는 글들은 따로 있다고들 했다. 그런데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희곡을 써야겠다'는 생각만 강해졌던 그였다. 모든 게 '돈'과 연결되는 수업 내용에 그는 연극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연극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마음만 맞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준비를 할 수도 있죠. 하지만 자본의 흐름이 개입되는 순간 '사업'이 되고 '산업'이 되더라고요. 저랑 조금 안 맞는 세계 같았어요. 돈이 많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 착취하지 않는, 건강한 작업환경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좋아요. 같이 작업하는 친구들에게도 연극을 왜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표현은 다 달랐지만 요지는 하나였어요.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게 좋다는 거였죠. 극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게 일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멋진 '일' 아닌가요."


그는 확신에 차보였다. 극 작업은 적어도 그를, 그와 작업하는 사람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 확신 때문에 그는 업계에서 버틸 수 있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말이다.


"창작자는 자신의 존재를 걸고 작품에 책임을 져야 해요. 처음엔 그게 정말 힘들었어요. 이렇게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희곡을 쓰지 않았을 거예요. 혼자 글 쓰는 작업만 생각했지, 연습실에서 스탭과 배우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별 한 개도 아깝다'는 관객의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몰랐죠. 내 창작물인지라 내 존재와 동일시되는 부분이 많아서 더 힘들어요. 작품을 설명하다보면 내 존재를 이해시켜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이해시키지 못할 것 같을 땐 자괴감이 들기도 하거든요. 처음엔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어요. 그래도 지금까진 어떻게 견뎌내고는 있네요. 이제는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단계까지는 왔어요."


그를 견뎌낼 수 있게 해준 건, 그래도 작품을 소중히 여겨주는 이들 때문이다. 작품과 창작자를 존중하고 그 작업 자체를 사랑하는 힘. 작품을 사랑하면 나올 수 있는 에너지가 다르다고 말하는 그였다. 그 에너지로 그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받아온 것은 아닐까. 그는 어떤 내면의 이유로 계속 극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꿈꿨던 건, 상상하는 모든 걸 구현가능한 게 영화라고 생각해서였어요.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죠. 오히려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연극인 것 같아요. 배우가 '여기 문이 있다'고 하면 관객들은 문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약속을 하고 믿어주는 것이 가능한 무대가 있다는 것, 정말 멋있는 일인 것 같아요.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에 무엇이든 믿어주는 것, 그게 연극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비대면화되는 시기에 대면의 위로를 전할 수 있는 곳이 극장이기도 하고요."


"당신의 숲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요즘 제 숲속에는 TV 소리가 흐르고 있을 거예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직업이다보니,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끊이지 않거든요. 머리를 좀 쉬게 하고 싶은데, 플롯이 있는 걸 보면 머리가 쉬질 않아요. 좋아하는 영화를 봐도 일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아서, 그냥 TV를 틀어놓고 멍 때리고 있어요. 그제야 머리가 좀 쉬는 것 같아요. TV 속에 나오는 재미있는 것들을 보면서 현실의 걱정거리를 잊어버릴 때도 있죠. 제 안의 어두움이 희극적 요소를 통해 밝아지는 느낌이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가 떠오른다는 그의 숲에서 TV 소리는 그나마 작은 쉼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다. 코미디쇼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숲을 상상해본다. 그곳에서 쉼을 누리는 그는 어떤 곳을 향해가고 있을까.


"사람마다 비극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저는 그것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어요. 인생의 부침이 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려 해요.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제가 계속 마음이 가는 게 있다면, 자기 자신을 잘 몰라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집중하고 싶어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이 마음 아팠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연을 만들거에요. 사람들이 '다른 것은 포기해도 공연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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