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맛있게 구워진 생선을 먹다 가시가 덜컥 목에 걸린 듯 삶이 멈췄다.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고 위로 빼낼 수도 없이 꼼짝없이 박힌 가시처럼 일상도 정지되었다. 언젠가 '고래' 라는 소설을 읽으며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라는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먼지는 닦아내는 일이기도 할 테고, 끊임없이 먼지를 닦아내는 그 자체가 가장 어려운 삶의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길고 험한 삶의 여정에서 날마다 일정하고 간결한 리듬으로 먼지를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때로는 손가락 끝에 닿는 먼지를 털어낼 기력도 없이 쓰러져 있는 무력한 날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다 내려앉은 먼지 더미에서 허우적거리는 때도 있다.
밤새 뒤척이다 책장에서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어린이 세계지도’
두통 때문에 빼곡히 글자가 적힌 책은 읽기 어려워 그림책에 손이 갔다. 어릴 적부터 생일마다 지구본과 세계지도는 받고 싶은 선물 목록 1호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 돈을 벌어 휴가엔 해외여행을 다닐 줄 알았는데, 해외는커녕 집 밖에도 잘 못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방 안에서만 지내는 답답함을 잠시라도 해소하고픈 마음에 세계지도를 선택한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넘기며 가보고 싶은 지도 위 나라들을 훑어보다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린란드는 캐나다, 아이슬란드와 국경이 접해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섬으로서, 이름과는 달리 섬 전체 면적의 85프로이상이 얼음으로 되어있다.’
얼음으로 뒤덮인 땅에 ‘그린란드’라는 이름이라니. 그 모순이 불쑥 마음에 들어왔다. 학교대신 병원을 오가는 게 외출의 전부인 날을 보내며 다시 수술을 준비하는 막막한 날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청춘의 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마음은 얼어붙었고, 청춘은 빛이 바랬고, 푸르던 꿈은 희미해졌다. 나는 얼음나라에 서 있었다.
그린란드는 ‘붉은 머리의 에리크’라 불리던 사람이 붙인 이름이다.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당해 그린란드를 발견한 어색한 탐험가였다. 그리고 얼음뿐인 그 땅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인 희대의 거짓말쟁이기도 했다. 이런 창의적이고 대범한 거짓말이라니. 죄를 짓고 살아남고자 했던 그의 거짓말은 한 나라의 이름이 되어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다. 그 거짓말이 얼음나라에 서 있는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희망은 어쩌면 거짓말과 다르지 않은 지도 모른다. 절망스런 상황에서 희망을 붙잡는다는 것은 거짓말처럼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희망이란 온통 얼어붙은 현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푸른빛을 마음으로 먼저 보는 것이다. 현재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서 느껴지지 않는, 그 너머에 숨겨진 소망을 앞서 보고 움켜쥐는 일이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달콤한 거짓말에 진심으로 속는 게 희망인지도 모르다. 그 소망을 꽉 움켜쥔 마음은 현실을 뛰어넘는 힘을 지닌다. 가장 차갑고 시린 시간에 푸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소망이 꿈틀거렸다. 새하얀 얼음나라에 붙인 ‘그린란드’라는 이름이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녹였다.
그린란드
가장 차갑고 삭막한 땅에 붙여진
제일 푸르른 이름
누군가의 거짓말
거짓말이 움켜쥔 희망
나의 시린 겨울
아무것도 자랄 수 없던 대지
어느 것도 꿈꿀 수 없던 추위
어떤 것도 보이지 않던 눈보라의 계절에도
모순된 이름을 붙일 수 있길
그 눈보라 속에서 영혼이 가장 빛났노라고
그 삭막함 속에서 마음이 제일 풍요로웠노라고
그 시절이 내 삶에서 최고로 눈부시게 푸르렀노라고
그 날 산문도 시도 아닌 어설픈 이 글을 끼적였다. 문득 집어든 책을 통해 고갈된 마음에 푸른색 연료가 조금 주입되었다. 나의 은밀한 빙산에도 언젠가는 ‘그린란드’깃발이 펄럭이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만년설이 빙하가 되어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는 곳. 극한의 기온을 견디며 밤을 지새운 대가로 하늘에 수놓아진 신비한 오로라를 선물 받는 곳. 그린란드의 이름과 함께 그 풍경을 마음에 담아보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조금 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험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 힘으로 다시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수북이 먼지 쌓인 일상의 한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린란드를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길고 험난한 여정이 될 줄은 미처 모르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