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어들기의 정석
'먼저 가세요'의 영어식 표현은 'After you...'였다. 물론 'You go first'라고 해도 모두 알아듣겠지만 그들의 표현방식은 달랐다. 나는 'After you'라는 문장을 처음 듣고는 감탄을 했다. 이렇게 간단하면서 세련되게 양보를 말하는 언어가 있다니 말이다. 왜 우리는 이런 세련된 표현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우린 양보를 미덕으로 삼는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부당거래'의 명대사가 있지 않은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안다는...', 그게 권리이든 둘리이든 우리는 그랬다. 양보하지 않는 사회였으며, 누군가 양보하면 호구취급을 당하는 문화였다. 오~ 너 양보해 줬니? 그럼 계속해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차량행렬에 한대를 끼워주면 그 틈으로 서너 대가 비집고 들어온다. 그들은 그게 권리인 줄 아는 게 아니라 양보해 준 인간이 호구라고 생각하는 거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지름길인 모 대학교 외곽의 뒷길을 따라 출근을 하다 보면 두 개의 길이 만나는 곳이 나온다. 동작구의 한 아파트 앞길인데 왼편에서 살짝 경사로를 넘어 합류하는 도로의 끝에 가면 아무도 왼쪽 길에서 들어오는 차를 끼워주지 않는다. 그들은 우회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길이 하나로 합쳐질 뿐이다. 강남을 제외하고 서울에는 이런 길이 널렸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가는 길이 메인도로라는 생각에 옆에서 끼어드는 차에 양보하지 않았다. 막히기도 했다. 그러나 왼쪽 길에서 오는 차들은 양보해주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이런 도로에선 당연히 한 대씩 교대로 들어가는 게 원칙이다. 그런 생각으로 한대를 끼어주면 그 뒤로 바짝 따라붙는 차들이 있다. 나는 이런 경우 접촉사고가 나더라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내가 양보해야 할 차는 한대까지이기 때문이다.
나도 출근길이 바쁘다. 급한 마음에 먼저 가고 싶은 마음은 같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급해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응급상황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모두들 무슨 이유인지 남의 차 앞을 가로막기 일쑤고 속칭 '칼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 버린다. 그것이 얼마나 무례한 행동인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들은 폭주한다. 우리나라 교통환경이 제아무리 열악하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도로에만 나서면 화가 나는 이유였다. 우리는 'after you'가 아니라 'after me'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먼저 가세요'라는 표현부터 틀려먹었다. 이 문장에는 내가 당신에게 양보한다는 생색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먼저 가세요'가 아니라 '뒤에 갈게요'가 맞다. '당신 먼저'가 맞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이 먼저다. 그래서 자기 앞에 끼는 차를 참지 못한다. 누가 감히 내 앞길을 가로막느냐는 거다.
그래서 나는 차선변경을 할 때 항상 깜빡이를 켜고 옆차선에 가는 차의 뒤로 천천히 붙는다. 그 차의 꽁무니에 바짝 붙어서 차선을 바꾸면 뒷 차도 웬만해서는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왜냐? 내 차가 자기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앞의 차 역시 자신의 꽁무니에 붙는 차를 불쾌해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 자신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귀에 못이 박히게 한 말이 있다. 바로 '존중과 배려'다. 세상 살 때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 문제는 타인의 존중과 배려를 권리인양 누리는 바보 천치들이다. 그래서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의 존중과 배려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인간은 그냥 거르라고. 그런 인간에게 존중과 배려를 할 이유는 없다고. 그들은 자기가 잘나서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망상장애에 빠져있는 거니까 절대 상대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망상장애가 판을 치는 세상, 나는 'after you'를 지키고 살겠다. 다만 you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