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너’를 처음 본 그 날. 그 날은 평소처럼 도서관에 가지 않고 카페에 갔다. 친구가 자기가 수업 들어가는 한 시간, 아니 딱 오십분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저어기 꼭대기에 있는 도서관을 왔다갔다 하기엔 아직도 너무 더웠다. 나는 친구 강의실에서 가까운 카페에 가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으려고 했다. 카페 카운터 앞에서 뭐를 마실까 고민하는데 내 앞에 먼저 선 남자가 카푸치노를 주문하길래 나도 그거나 먹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남자가 주문을 다하고 뒤로 돌았는데...
그동안 꿈꿔왔던,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
내 이상형이었다,
나도 서둘러 주문을 마치고 픽업대 근처에 서서 그 남자가 들고 있는 두꺼운 책을 슬쩍 살펴봤다. 책 옆에 가지런히 이름이 쓰여 있었다.
수학과 박도겸
이건 운명이다.
내가 이 카페를 고른 것도 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받고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앞으로 내가 무엇부터 해야할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과 박도겸?”
내가 다니는 과와 수학과의 연결고리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수학과인 너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절박했으니까 너를 만나자마자 박도겸에 대해 아는 건 다 말해달라고 했다.
너는 내 입에서 박도겸이라는 이름이 나올 줄 전혀 몰랐겠지. 내가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 날 내 말을 들은 너의 표정만큼은 기억이 난다. 당황, 당혹, 황당 그런 걸 섞은 너의 표정.
“박도겸을 왜 나한테 물어봐?”
“네가 같은 과니까.”
그때 네가 나를 어떻게 봤더라. 네가 까칠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니지, 오히려 나한테 친절한 편이었지. 그런데,
“걔랑 안친해.”
너는 알만하다는 눈으로 나를 훑어봤다. 하지만 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정말로 네 소매를 잡았다. 잡고 나서 선 넘은 건가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뭘 어떻게 하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절박함이나 보여주자 하고 눈 딱 감고 매달렸다.
“걍 아는 것만 좀 말해줘. 아무거라도. 제발.”
너는 내가 잡고 있는 소매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소문내면 어쩌려고?”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나는 힘이 빠져 네 소매를 놓았다.
“... 난 네가 뒤에서 남 얘기하는 애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구나.”
어쩐지 너는 나보다 더 힘이 빠진 얼굴이었다.
-
“박도겸 이번 학기에 가정론 듣는대. 목요일 B반.”
내 절박함이 닿은걸까. 결국 너는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나면 묻지 않아도 ‘너’의 소식을 알려줄 만큼 너도 이 상황에 익숙해졌다.
“오케이, 정정기간만 노린다.”
“근데 너 지난 학기에 가정론 들었잖아.”
“... 헤헤. 들켰다.”
“도대체 박도겸 어디가 그렇게 좋아?”
“얼굴! 우리 도겸이 얼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니야?”
“...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내 귀에 미리 사과한다.”
“도겸아, 너는 왜 이름도 도겸이야.”
나의 끝나지 않는 나의 박도겸 찬양을 들어주는 것도 어느새 너였다.
“넌 참 기억력도 좋아. 내가 지난 학기에 들었던 수업까지 기억하네.”
“B 나와서 재수강 못한다고 울던 거 아직도 기억나는데.”
나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지난 학기에 가정론 기말고사를 너무 못봐서 재수강 하려고 결심했는데 막상 B가 떠서 이도저도 못한다고 너한테 징징거렸었지.
“그런 건 기억하지 말아주세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너와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심지어 1학년 때 같은 반이기도 했다. 너는 이과를 가고 나는 문과를 선택해서 반이 나누어졌지만, 그 후에도 오며가며 인사하고 가끔 얘기하곤 했다. 대학교 와서 다시 만났을 때도 서로 같은 학교 왔다고 반가워하지 않았던가? 신입생 때는 과 동기들이 나보고 수학과에 남자친구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는데.
“으엣-치”
그래도 10월인데 뭘 좀 걸치고 나올까 하다가 이때 아니면 언제 입을까 싶어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가을은 항상 오늘 좀 쌀쌀하네라는 생각보다 늦게 알아차린다니까.
“추운데 왜 하나만 입었어.”
뭐라고 하면서도 너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서 내게 걸쳐줬다.
“괜찮아.”
“빨리 들어가. 너 3시에 수업이잖아.”
너의 말에 시계를 보니 벌써 55분을 지나고 있었다. 이 수업 출석체크 칼같이 하는데 내 정신 좀 봐. 지난번에도 늦어놓고.
“네가 인문관에서 보자고 해서 다행이다. 나 다음 수업 여기 3층에서 하거든.”
처음엔 내가 학생회관에서 보자고 했는데, 네가 인문관에서 보자고 약속 장소를 바꿨다.
“지난번에도 지각했잖아. 빨리 가.”
“너는 참 기억력도 좋다.”
나는 너에게 가디건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입고 있어. 저녁에 비 온대.”
너는 나에게 다시 가디건을 쥐어줬다.
그날 저녁에 정말로 비가 왔다. 낮보다 온도가 뚝 떨어졌지만 네 가디건 덕분에 집에 돌아가는 길이 따뜻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춥지 않았을까? 우산은 있었을까? 나는 그제서야 네 생각이 났다.
-
‘너’의 정보를 얻는 대신 나는 너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 그 소원을 담보로 나는 너에게 박도겸 정보를 꽤 얻었다.
좋아하는 수업은 무언지, 요즘 듣는 노래, 읽는 책은 무언지, 공강 시간에는 무얼하며 시간을 보내고, 학교 끝나고는 또 어떤 걸 하는지, 학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은 어딘지, 학생 회관에서는 무얼 제일 자주 먹는지. ‘너’에게 묻고 싶은 것 투성이었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다.
“그렇구나. 도겸이는 이제 카푸치노 말고 자몽에이드를 더 자주 마시는구나.”
“맨날 박도겸 좋아하는 것만 알아서 뭐하려구?”
“님이 짝사랑을 아세요? 나도 따라서 좋아하려고 그러지. 도겸이는 자몽티도 좋아할까?”
‘너’에 대해 하나 더 알수록 하나 더 궁금해 하는 나를 볼 때마다 너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익숙해질때도 되지 않았니.
-
기말시험를 하루 앞두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네가 정보를 너무 안줘서 네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네가 나를 다 기다리구. 웬일이야.”
“요즘 좀 대화를 못한 것 같아서.”
“또 박도겸 얘기겠지.”
“헤헤. 정답!”
“해줄 얘기가 하나 있기는 한데...”
“뭔데?”
“조용한 데서 하면 좋을 것 같아.”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어쩐지 네 표정이 어두웠다.
“그러면 나 트리 보러 갈건데 같이 갈래? 뒷문 성당에 큰 트리.”
이주 전에 정말 우연히 ‘너’를 본 적이 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지만 나는 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음속 귀를 커다랗게 키우고 천천히 네 옆을 지나갔다. 그러다 네 앞에 선 여자애가 별안간 네게 ‘좋아해’라고 하는 바람에 심장이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다. 그 다음에 바로 네가 ‘미안해’라고 해서 겨우겨우 그 옆을 멀쩡한 척 지나갈 수 있었지만.
그 후 나는 결심했다. 이번이 내가 고백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용기가 부족해서 나는 고백 준비의 마지막 단계로 소원을 들어주는 트리를 생각해냈다.
우리 학교 뒷문 쪽에 성당이 있는데, 12월이 되면 성당 앞 큰 나무를 크리스마스 트리로 꾸몄다. 트리에 소원만 빌고 고백을 하자 하자 하다가 기말고사까지 와버렸다. 네가 조용한 곳이라고 하자마자 나는 바로 그 트리가 생각났다.
너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나와 너는 성당이 있는 뒷문까지 걸어갔다.
“한쪽 낄래?”
나는 장갑 한쪽을 내밀었다. 아까부터 너는 주머니에 손을 꼭 넣고 있었다.
“그럼 너는?”
“나는 이렇게 하면 되지.”
나는 남은 장갑 한쪽에 두 손을 다 넣었다. 장갑이 커서 두 손이 충분히 들어갔다.
“괜찮아.”
너는 장갑을 돌려줬다.
“너 손 시렵잖아.”
나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덥썩 네 손을 잡았다.
“거봐. 이렇게 차가운데 안낀다고 그래.”
“야”
손 시려운 거 들킨 게 그렇게 놀랄 일인지.
너는 놀란 눈으로 내 얼굴과 네 손을 잡은 내 손을 쳐다보기만 했다.
“나 그만 보고 소원이나 빌어.”
너와 나는 금세 트리 앞에 다다랐다. 나는 다시 두 손을 다 장갑 하나에 구겨 넣었다. 그 채로 손을 들어서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네가 웃었다. 난 진지한데 왜 자꾸 웃어.
그 때 오른쪽 뺨에 차가운 게 스쳤다.
“눈 온다.”
네가 말했다. 너는 여전히 내가 준 장갑을 끼지 않고 한 손에 든 채로, 다른 손 손바닥을 펴서 떨어지는 눈을 잡으려고 했다. 아직 잘 보이지는 않지만 하얀 게 날리기 시작했다.
“이거 첫눈인가?”
“응, 맞아.”
첫눈이라는 말에 나는 괜히 신이 났다. 그러고 보니 눈 오는 날에 이 트리가 낯설지 않았다.
“아- 기억났다! 나 작년에 여기 소원 빌러 왔을 때, 그때도 눈 왔었어.”
이 뿌연 날씨에 혼자 반짝이는 있는 트리처럼 일 년 전 기억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날도 그 해 첫눈이었고.”
“그랬나? ...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트리에 소원 빌었다고 말했었나?”
“너는 트리만 기억나고 나는 기억 안나지?”
너?
작년 이맘때 나는 여기에 와서 소원을 빌었고,
그때도 추웠고, 눈이 왔고, 오늘처럼 기도하려고 손을 잠깐 꺼냈는데 너무 시려웠고...
그래서 손을 호호 부는데 그때 장갑을 건넸어...
네가!
“장갑! 너 장갑 줬었지 나한테!”
“이제 기억나?”
“너랑 나랑 그때도 같이 트리 보러 왔었구나. 어떻게 그걸 다 까먹지.”
“네 기억력이면 가능해.”
“미안...”
이건 미안한 게 분명했다. 네 기억에는 내가 있는데, 내 기억에는 네가 없으니.
“이것도 설마 네 장갑이야?”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들어 보이며 너에게 물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그때 그 장갑은 아니었다. 이건 내가 한 달 전에 산 거니까. 하지만 너를 그렇게 잊을 정도였으니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게 의심되기 시작했다.
“바-보. 그건 한 달 전에 산 거잖아. 학교 앞 옷가게에서.”
“... 너는 어떻게 그렇게 다 기억해?”
“너도 박도겸이 어디서 뭐했는지 다 알잖아. 걔는 기억 못해도.”
‘너’는 이주 전에 동아리방 들어가는 복도에서 고백을 받았지...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박도겸 여자친구 생겼대.”
갑작스러운 너의 말에 나는 뭐라도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보같이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무, 무슨 친구?”
“여자친구.”
아...
‘너’는 결국 고백했던 그 아이와 사귀나보다. 내 마음은 너에게 전하지도 못하고 끝을 내야하나보다. 나는 그만 힘이 쭉 빠져버렸다. 소원이고 뭐고 이제 트리에 빌 필요도 없었다. 나는 트리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내 마음도 주저앉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날리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조용하게 트리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도... 네가 울지 않아서 다행이야. 어떻게 말해야할지 나도 고민했어.”
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 말을 전하기 힘들어서 그동안 바쁘다고 했나 보다.
“미안해. 그리고 알려줘서 고마워.”
“나한테 뭐가 미안해.”
“괜히 신경 쓰이게 했잖아, 내가.”
“괜히는 아니구. 내가 신경쓰고 싶어서 신경쓰는 거지.”
아까부터 네가 하는 말에 자꾸 물음표가 띄워졌다.
하지만 아직 내 마음의 바다가 너무 요동치고 있어서 물음표 보고 닻을 내리라고 할 수 없었다.
“이 트리 말이야. 소원 안들어주는 것 같아.”
“위로 안해줘도 돼.”
“진짜야. 나도 작년에 빌었던 소원 안들어줬어.”
나는 작년에 이 트리에 남자친구가 생기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 다음 해에 내 인생에 박도겸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그 소원이 이루어지나 했다.
“박도겸도 짝사랑 오래 했대. 나도 들은 거지만 네가 걔를 좋아하기 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나봐.”
그러면 지난번에 봤던 그 고백하던 여자애도 차였겠구나. 너도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니 정말 의외였다. 늘 다른 사람을 통해 너를 들어왔으니 내가 너를 모르는 것도 당연한걸까. 내가 좋아하던 너는 누구였을까.
“내가 고백했어도... 잘 안됐겠지?”
씁쓸한 마음에 그런 말이 툭 나왔다.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도겸이가 다른 사람 좋아하는 걸 알았어도 고백하려고 했을까?”
“...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데... 그걸 아는 네가 박도겸한테 더 보태진 않았겠지.”
“그래, 그 힘든 거 이제 그만하라고 하나보다.”
갈수록 눈이 더 많이 와서 정류장에 돌아가는 길에 우산을 하나 샀다. 네가 두 개를 사왔는데 내가 가져가서 하나는 환불해 버렸다.
“이런 날은 눈도 좀 맞고 그래줘야 하는거야.”
“이럴 때는 비를 맞는거거든."
그러면서도 너는 내게 우산을 씌워줬다.
"슬프면 좀 울어도 되고.”
“집에 가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서 펑펑 울거야. 그리고 마음 정리할거야.”
“... 그래, 조금만 울어. 너무 많이 울지는 마.”
나보다 더 심각해진 네 얼굴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내가 비참하거나 말거나 슬프거나 말거나 이 모든 걸 너는 모를텐데, 내 짝사랑에 상관도 없는 ‘너’가 나보다 더 심각하다니.
“너도 작년에 소원 빌었어?”
“응. 소원 빌러 갔다가 널 만났지.”
나는 또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그날 우리는 각자 소원을 빌러 와서 우연히 트리 앞에서 만났다.
나도 이제 ‘너’를 좀 기억해야되지 않을까.
“너도 트리가 소원 안들어줬구나.”
우산 위에 사박사박 눈이 쌓이고 있었다.
“이제 트리에는 소원 안빌거야.”
“나도. 크크크.”
나는 결국 웃어버렸다. 트리에 소원을 빌지 않고 바로 고백했으면 나도 그 여자애처럼 거절당했겠지. 어차피 너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트리 덕분에 끝낼 수 있었던 거였다, 내 짝사랑.
“하지만 올해도 소원은 빌 거야.”
“너한테.”
그렇게 말하고 네가 조금 웃었다.
“그래 뭐, 짝사랑은 끝났어도 소원은 들어주기로 약속한 거니까.”
나는 얼버무리다가 네가 웃는 걸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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