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잊고 지낸 시야

by 김태형

제왕이 지나온 길


백전백승의 기세로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왕이시여
당신이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십시오

당신이 지나온 길에는
피 흘리는 한 사내아이를 끌어안은 여인이 울고 있으며
땅에 떨어진 곡식들이

당신이 피운 불과 휘두른 창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당신과의 싸움에 사활을 걸고 임한

패장병들의 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당신의 바로 뒤에는 손목 잡힌 채

울며 끌려오는 포로의 통곡이 울립니다

비록 당신은 후세에게 보일 기록에

승자로 남고 금의환향하며

자국의 백성에게 환대받을 분입니다
승리자, 그뿐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패배가 있어 당신의 승리가 있습니다
당신만큼은 한 번 즈음은 뒤를 돌아보면 했습니다
백전백승의 기세로 다음 전쟁도 승리로 이끌 제왕이시여



무명의 커튼콜


낮은 나의 목소리가 울리는 쓸쓸한 밤이다
고독한 곳에서 퍼지는 쓸쓸한 밤이다

누군가는 환호라는 물결 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며
결국 화려하게 자신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나 같은 사람들은 소외된 악몽 같은 곳에서 발버둥 치며
허우적대느라 나간 넋을 챙기는 정신없는 시간이다

분명 나는 박수를 받으며 빛나야 할 이 시기에
나간 넋과 한 아름 들어야 할 꽃다발은 어찌 된 연유로 없고 나의 의기소침한 목소리만 내 귓가로 돌아오는가
관객에게 무엇을 잘못해 그들은 내 앞에서 사라졌는가

유명한 별이 되기를 바라며 내가 숨 쉬는 곳
내가 빌린 지하의 연습실은 오늘도 관객 없이
내 입이 뿜은 내 목소리가 내 귀에게 잠잠히 들려준다

커튼콜이라는 열광의 자리가 무명에겐

그저 열등의 자리일 뿐



팔 잃은 광대


꿈을 개화시키기는 춥고 척박한 공간에서
웃음주기 위해 다시 찾은 수치스러운 공간에서
유일한 재주 품은 값진 왼손이 공중에서 경이로운 춤을 춘다

내 일이라 함은 왼손이 공 서너 개로
지배인들의 이목을 끄는 일
그들에게 웃음을 조공하며 나는 조롱을 하사 받는 일

내일을 준비하던 나의 왼손은
갑자기 꺾이고 요동치기 시작한다
팔척귀신이 한숨을 뱉어 비어버린 속을 꿰차는 듯이
한 그루의 사시나무가 바람에 연약하게 떨리는 듯이

그렇게 왼손은 공을

떨어뜨린다...

고된 곳 찾아가서 재주를 다듬지 못하자
나는 떨고 있는 왼손에게 광기에 찬 원망을 보낸다

내일을 위해 지금이라도
날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별 수 없이 나는 왼손을 대신해

오른손에게 공을 처음 쥐어주었다

내 왼손은 날 수치의 품에 빠뜨리지긴 했어도
수치를 잊을만한 금화를 쥐어주곤 했었는데

내 오른손은 나의 자식들에게 주말 저녁
피자 한 판 사주지 못할 듯하다
떨림 없던 왼손의 신들린 손길이 그리워진 밤이다

수 십 년의 왼손의 경력을
몇 분에 불과한 오른손의 노력이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

왼손으로 오른팔을 겨우 움켜잡고 내면의 기합과 함께 사정없이 꺾어본다
통한을 섞어 뽑아본다
또한 이성을 잃고 사랑하는 이름들을 포효해본다

그렇게 두 팔을 잃은 나는 비참히 나가떨어진다...

떨려오는 손으로 진중한 편지를 남긴다
내일은 공 잡을 손이 없다고
그래서 지배인들께 웃음을 선사하지 못한다고
광대로 사는 아버지여서 부끄럽기만 하다고

남에게 웃음을 주는 일이
어찌 나에게는 웃음이 아닌 눈물만이 흐르는지

내일은 내가 눈물이라도 흘릴 수 있을지
그것보다 편지를 오늘 전해드리러 갈 수 있을지
나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는 있을지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다
난 울기만 하는 광인일까 웃음을 주는 광대일까

두 팔을 벌린 채 옥상에서 도약한 지 3초 뒤에 생각한다
누구일까... 난...



정전


유를 깨닫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의 상황에서 직접 체감하는 것이다

유의 상황에서는 다능한지 모르다가도
무의 상황에 빠지면 얼마나 무능한지 알게 된다

자 내가 네게 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겠다

그러자
곧 두꺼비집이 내려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