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고, 마주하니> (코끼리들이웃는다 on Sync Next 25)
극장은 안전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일상의 세계에서는 정상의 규범에서 벗어난, ‘불온’하다고 여겨지는 생각도 극장에서는 그것에 합의한 창작자와 관객들 사이의 공통 감각이 된다. 시간적, 금전적 비용을 감수하고서 극장을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함께 객석에 앉은 낯선 이가 어떠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낯선 이들이 하나의 시공간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점에서 긴장으로 가득한 공간이기도 하다. 안전의 감각이 이완을 통해 가능하다면, 낯섦에서 비롯되는 감각은 그 반대편에 놓인다. 그럼에도 극장은 안전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시간 동안에 존재하는 매우 일시적인, 익명의 공동체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안전의 감각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는 어떻게 이 낯선 마주함 속에 안전한 감각을 느끼게 될까?
<마주하고, 마주하니>는 이러한 ‘마주함’의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실험이다. 극장에 들어선 45명의 관객은 서로에게 등을 맞댄 채 둥그렇게 놓인 의자에 둘러 앉는다. 그 앞으로 45명의 퍼포머가 마주선다. 파트너와 함께 조심스레 손을 맞잡고 서로를 지긋이 바라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면 레인스틱의 소리를 신호삼아 퍼포머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칸씩 움직인다. 그렇게 또 다른 마주함의 순간이 시작되고, 모든 만남 끝에 다시 처음의 파트너와 재회한다.
뒤이어 관객과 파트너는 서로의 등에 기대어 천천히 바닥에 가까워지고, 어깨에 머리를 올려둔 채 바닥에 함께 눕는다. 점차 어둠이 감도는 극장에서 상대방의 호흡에 집중하며 숨을 고른다. 다시 극장이 밝아지면 퍼포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허밍으로 합창하며 관객들을 둘러싼다. 그리고 합창의 끝에서 그들은 자신의 파트너 관객에게 자신이 쓴 편지를 건네고 뒷편으로 퇴장한다. 극장에 남은 관객들은 자신의 답장을 의자 위에 남겨둔 채 그곳을 떠난다.
상대방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관객과 퍼포머는 오로지 눈빛과 맞잡은 두 손만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낯선 이와의 처음 맺는 관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색함과 긴장, 혹은 불편이 앞서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주함의 순간이 이어질수록 등 뒤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등지고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현실에서의 긴장과 무게를 내려놓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마주하고, 마주하니>는 ‘마주함’을 통해 기존의 극장이 확립해 온 공고한 경계를 해체한다. 공간적으로 분리되었던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를 침범하고, 퍼포머를 향한 관객의 일방적 시선을 넘어 둘 사이의 물리적 접촉이 이루어진다. 마주 ‘보다’가 아닌 마주 ‘하다’라는 동사의 선택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단순히 서로의 시선이 교환되는 것을 넘어 그와 동시에 극장에 감도는 공기와 분위기,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누군가의 인기척, 그밖에도 수많은 감각적 교류가 마주함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더 넓은 층위의 감각을 통해 마주함의 경험이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은 공연의 말미에서 ‘편지’라는 언어적인 형태로 전환된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이와 눈을 마주하며 그 사람의 삶과 사연을 상상하고, 때로는 그것으로부터 나의 삶에서 마주했던 순간들을 회상하게 된다. 일체의 장식과 서사가 제거된 극장에서 다층적인 감각적 접촉과 각자의 내면에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서사를 통해 연극성이 창발한다. 그러나 편지라고 하는 문자화된 정보가 개입하는 순간, 관객이 상상하던 것이 아닌 일종의 ‘정답’을 지시하는 것처럼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관객의 감각적 경험이 비언어화된 형태로 이어질 때 작품이 선사하고자 했던 ‘마주함’의 순간이 더욱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교감의 순간이 안전의 감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을 필요로 한다. 관객과 퍼포머 사이의 마주함이 전부인 듯한, 매우 단순해보이는 규칙을 위해서는 그만큼 더 정교한 기획이 요구된다. 안전의 감각은 불안과 긴장이 사라진 이완의 상태를 전제로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치밀한 설계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정교한 규칙들은 사람들을 긴장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규칙이 안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완의 감각을 뒷받침한다. 안전한 창작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한 실천과 함께 최근 10여 년 사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Chicago Theater Standard, CTS)’[1] 등의 선언 혹은 프로토콜 또한 체계적인 설계를 통한 안전공간 만들기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마주하고, 마주하니>에서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선 접촉이 이루어지는 만큼, 위험의 방식 또한 예측할 수 없기에 규칙이 더욱 중요해진다. 특히나 위생과 감염, 폭력이나 성적 불쾌감 등 신체적인 접촉이 갖는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퍼포먼스의 설계에 다소 간의 아쉬움을 남는 것도 사실이다. 관객들은 별다른 지침이나 규칙을 전달받지 않은 채 곧바로 마주함의 순간에 놓인다.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극도의 긴장상태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있다. 이를테면 관객은 퍼포머들과 마주하기 위해 의자에서 제자리에 일어나 있는 상태로 40여 분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데, 혹자에게는 상당한 신체적 부담이 될 수 있다. “움직이지 말라”는 명시적인 금지가 없지만, 극장에서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에 익숙치 않은 관객에게는 ‘움직여도 된다’는 허가의 부재는 사실상 행위를 제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한국인 관객이 갖는 심리적 장벽을 고려한다면, “시선을 피해도 괜찮다”라는 가능성을 분명히 제시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퍼포머와의 신체접촉 또한 마찬가지다. 해당 내용이 사전에 고지되었다고는 하나[2],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작품의 일부’라는 표현에서부터 작품의 ‘대부분’이 심리적 접촉을 요한다는 사실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했던 CTS 등의 선언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한다. 관객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함으로써 자유를 부여하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이나 공간을 제안한다면 더 많은 관객들이 안전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보여준 ‘마주함’의 순간들은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안전’의 감각이 작동하는 방식을 성찰하게 한다. 실제로 극장 안에서 눈물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관객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도한 바를 상당 부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치유의 순간에 더욱 정교하고 치밀한 설계가 더해져 더 많은 관객들이 함께 안전의 감각을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낯선 존재들과의 일시적인 ‘마주함’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극장이 안전한 공간으로 감각될 수 있도록 만드는 창작자들의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안전공간을 만들기 위한 <마주하고, 마주하니>의 시도가 모든 공연과 극장, 나아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마주함’의 순간으로 확장되기 위한 실천들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마주하고 마주하니>는 코끼리들이 웃는다의 공연으로, 세종문화회관의 Sync Next 25와 2025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2025년 7월 20일부터 22일까지 세종S씨어터에서 진행되었다. 이 글은 2025년 서울문화재단의 비평활성화지원 시범사업 [RC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으며, 서울예술지원포털 SPAC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 공연 제작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특히 안전사고 및 성적, 위계적 폭력에 대한 사항-과 그에 대한 예방책을 정리한 백서로, 2015년 미국 연극계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산되었다.
[2] 해당 공연의 예매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본 공연은 관객 참여형으로 진행됩니다. 일부 장면에서는 배우들과의 신체적 접촉이 발생할 수 있으며, 관객이 바닥에 눕는 참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다 편안한 관람을 위해 바지 착용을 권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