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언어로 써 내려간
사랑의 편지 ②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드 베르주락>

by 박진서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starbook1999/48


전쟁통에도 사랑은 계속된다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사랑에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죠. 당시 그들이 살고 있던 프랑스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스페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거든요.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드 기슈는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던 원래의 계획을 뒤집고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드 기슈는 이미 결혼을 했으면서도 록산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크리스티앙과 록산의 결혼 소식에 질투를 해서 이런 급작스러운 결정을 내립니다.

[드 기슈] (무대 안쪽으로 올라가며) 연대가 출발하고 있소!
[록산] (시라노가 계속 끌고 가려고 하는 크리스티앙을 붙들며 그에게) 오! ……그를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 무엇도 그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줘요! (…) 나에게 자주 편지를 쓰게 하겠다고! [시라노] (멈춰 서며) 아, 그건 분명히 약속하겠소! (3막 14장)

그러나 아무리 전쟁통이어도 연애를 할 사람은 다 한다는 말이 있던가요. 록산의 간절한 부탁과 크리스티앙의 사랑, 시라노의 헌신이 만나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사랑은 계속됩니다. 시라노는 총알이 사방에 날라다니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매일같이 편지를 보냅니다. 물론 자신이 아닌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요. 반면 크리스티앙은 록산을 그리워할 뿐, 전쟁터에서의 힘든 생활에 편지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게다가 자신과 록산의 사랑에 시라노가 자신보다 열정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르 브레] 그래도 이건 좀 심해. 편지 한 장 부치자고 매일 아침 해 뜰 무렵에 위험을 무릅쓰고……
[시라노] (크리스티앙 앞에 멈춰 서며) 그가 자주 편지를 할 거라고 약속을 했으니까! (크리스티앙을 바라본다) 자는군. 얼굴이 창백해. 이 친구가 굶주려 죽어 가고 있다는 걸 가엾은 그녀가 안다면…… 그래도 여전히 잘생겼군! (4막 1장)

매일같이 편지를 받은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열정, 정확히 말하자면 시라노의 열정에 감동받아 전쟁터까지 찾아옵니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군인들을 위한 음식들까지 한가득 준비해서요. 목숨을 건 록산의 사랑이 크리스티앙과 시라노는 물론 다른 군인들까지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죠. 어떤 전쟁과 싸움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위대함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전쟁터에서 재회한 록산과 크리스티앙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록산이 사랑하는 것이 자신은 아니지만 서브남주의 역할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시라노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죠.

[크리스티앙] 그녀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요!
[시라노] 뭐라고?
[크리스티앙] 그녀가 사랑하는 건 바로 당신이에요!
[시라노] 아닐세!
[크리스티앙] 그녀는 이제 내 영혼만을 사랑해요!
[시라노] 아니라니까!
[크리스티앙] 맞아요! 그러니까 그녀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에요. 당신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4막 9장)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록산이 찾아온 이후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사이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됩니다. 크리스티앙은 그제서야 시라노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시라노가 자기만큼이나 록산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됩니다. 뿐만 아니라 록산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편지 속 사랑의 말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죠. 자신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고 느낀 크리스티앙은 좌절하고, 시라노는 그렇지 않다며 그를 설득합니다.

[크리스티앙] 증인 없는 우리의 비밀스런 계약은 깨질 수도 있어요,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시라노] 계속 고집을 부리는군!
[크리스티앙] 그래요, 전 온전히 저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어요. 아니면 아예 사랑받지 못하거나! 진지 끝까지 전투 준비 상황을 둘러보고 올 테니 그녀에게 말해요. 우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4막 9장)

결국 크리스티앙은 이 사랑은 자신이 아닌 시라노의 것이니, 원래의 약속을 깨고 록산에게 이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자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알게된 록산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이죠. 그러나 세 사람 모두가 받게 될 상처가 걱정된 시라노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요? 록산은 자신이 지금껏 받아온 사랑의 편지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을까요? 록산은 과연 누구와의 사랑을 선택할까요? 여주, 남주도 아닌 사랑의 조력자인 서브남주 시라노에게 펼쳐질 로맨스의 결말은 <시라노>를 통해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시인, 중세 프랑스 최고의 힙스터

[드 기슈] (라그노가 잽싸게 가져다준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오늘날 시인은 누구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치품이오. 내 사람이 되고 싶소? (2막 7장)

<시라노> 속 대사들은 우리가 요즘에 만나는 연극 혹은 영화 속의 대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표현들 대신에, 어떤 감정이나 사람을 묘사할 때 하나의 대상을 여러 가지의 비유로 반복하면서 이야기하죠. 시라노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그렇구요.

이것은 바로 많은 대사들이 ‘발라드(Ballade)’의 형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발라드라고 하면 노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구요? 사실, 여기서 말하는 발라드는 중세 프랑스에 창작된 시의 한 장르를 가리킵니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일정한 문학적 규칙에 따라 감성적인 언어로 풀어낸 시인데요. 어떻게 보면 애절한 사랑노래를 뜻하는 요즘의 발라드와 비슷하지 않나요?

[시라노] (강의하듯 읊조리며) 그러니까 발라드는 8행 3절과……
[자작] (발을 구르며) 오!
[시라노] (계속 읊으며) 4행의 발구로 구성되는 시로서……
[자작] 당신 정말……
[시라노] 내가 싸우면서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짓고, 마지막 시구에서 당신을 찌르겠소, 자작. (1막 4장)

발라드는 각각 8줄로 이루어진 3편의 시를 마치 하나의 연결된 이야기처럼 구성한 장르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비유적 표현과 운율까지 살려야 하기 때문에 언어적 감각을 뽐내기에는 최고의 방법이었죠. 17세기 프랑스에서 좀 잘 나고 힙한 사람들은 발라드를 잘 지어야 했습니다. 시라노는 여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던 거구요. 록산의 이상형이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즉 발라드를 잘 짓는 남자였다는 점도 이해가 되죠?

[라그노] 작은 아망딘 파이 만드는 법.
힘껏 저어라, 계란 몇 알에 거품이 일 때까지.
그 거품에 섞어라, 잘 고른 시트롱 주스를.
거기다 부어라, 신선하고 연한 아몬드 우유를. (…) (2막 4장)

이 작품에서 시라노만큼 주목할 만한 시인이 한 명 더 있는데요, 바로 라그노입니다. 제빵사인 라그노의 생활은 예술과 전혀 거리가 멀고 신분도 낮지만, 그 누구보다 발라드에 진심인 사람입니다. 파이 만드는 법까지 발라드로 지을 만큼 말이죠. 콧대 높은 시라노가 인정하는 몇 안되는 실력자기도 합니다. 직업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밖에도 <시라노>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라드를 노래하고 있으니, 발라드를 보며 그 인물의 성격을 맞춰보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거에요.

[시라노] 당신에게 약간의 문학적 소양과 재치만 있어도
나에게 대충 이 정도는 충분히 말했을 거요.
하지만, 오 형편없는 존재여, 당신에겐
재치라곤 단 한 톨도 없고, 아는 문자라곤
단 세 글자, <멍, 청, 이>밖에 없소이다! (1막 4장)

아무리 똑똑하고 신분이 높아도 발라드를 제대로 짓지 못하면 수준이 낮다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더 ‘핫’한 사람인지를 겨루는 시짓기 대결이 아주 활발히 이루어졌죠. 시라노가 이런 시짓기 배틀의 아주 강자였다고 하구요. 1막과 2막에서 시를 지으며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뽐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오늘날의 랩배틀과 닮아있지 않나요? 상대방의 시가 형편없다며 비꼬는 모습은 디스전의 원조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발라드를 옛날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중세 프랑스의 힙합’처럼 생각한다면 훨씬 더 친숙하게 다가올 거에요.

국어시간에 만나는 고전문학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낯선 글자들로 쓰여 있어 처음 보면 어렵다고 생각하며 겁먹기 쉬운데, 그것도 마치 발라드처럼 그 시대의 대중음악이자 힙합, 유행가 같은 거에요. 이런 관점으로 다가간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고전문학들을 더 흥미롭게 읽어갈 수 있을 거에요. 때로는 랩처럼 라임과 운율을 살려보기도 하고, 중간중간 사용된 과거의 표현들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맞게 조금씩 바꿔보면서 말이죠. 유행어나 라임도 추가해보면서요.


마스크와 필터 뒤에 가려진 진심

코로나19가 마무리되면서 우리의 피부와도 같았던 마스크를 조금씩 벗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스크를 썼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외모 차이를 이야기하는 ‘마기꾼’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습니다. 이 표현이 장난스러운 농담으로 끝난다면 정말 좋겠지만, 누군가의 외모를 비하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슴 한 편이 무거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이나 틱톡같은 SNS 에서 사진과 숏폼(Short-form) 영상을 올리는 것이 하나의 큰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기본카메라는 ‘구닥다리’라고 여기고, 얼굴의 모습을 왜곡하는 필터를 쓰면 사용 전의 외모를 조롱하는 댓글이 달리곤 합니다. 개인 간의 접촉이 제한되고,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모바일 상에서 해결해야 했던 상황이 만들어낸 사회적 분위기라고 할 수 있죠.

이제 팬데믹의 막바지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다시 시작되는 만큼, 마스크와 카메라 필터 뒤에 가려졌던 진심을 읽으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때입니다. 물론, 3초의 첫인상이 평생을 결정한다는 말처럼 사람은 시각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겉모습을 넘어 그 사람의 진심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편지와 얼굴 뒤에 숨은 진심을 읽어낸 <시라노>의 사랑이야기처럼 겉모습에 대한 편견의 말들은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 전혀 몰랐던 상대방의 따뜻한 마음이 <시라노> 못지 않은 감동을 선사할지도 모릅니다.


▷ 도서 정보

에드몽 로스탕(이상해 역). (1897/2009). 시라노(Cyrano de Bergrac). 열린책들

http://aladin.kr/p/VFLM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