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언어로 써 내려간
사랑의 편지 ①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드 베르주락>

by 박진서
[시라노] (다시 펜을 쥔다) 그래, 써버리자, 완벽하도록 마음속으로 수백 번도 더 고쳐 썼던 그 사랑의 편지를. 종이 옆에 내 영혼을 내려 두고 그것을 베껴 쓰기만 하면 될 거야. (2막 3장)

외모와 내면 사이, 당신의 이상형은?

여러분의 이상형은 어떤 모습인가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특정한 사람이 아니지만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사항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자극하는 어떤 특별한 포인트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상형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사랑을 꿈꾸게 합니다.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1) 완벽한 이상형의 외모를 가졌지만 내면은 아닌 사람과 (2) 완벽한 내면에 그렇지 못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죠.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 큰 사랑을 느낄 것 같나요? 1번이라고 하면 외모지상주의자같고, 2번이라고 말하면 너무 가식적으로 보일까봐 걱정된다구요? 1번과 2번을 적절히 섞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번에 만나볼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락>에서 말이죠.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연극의 세계에 불가능이란 없거든요. 외모와 내면을 반반씩 섞은 완벽한 이상형과의 사랑,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까지…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청춘 로맨스를 만나러 가볼까요?


'완벽남' 시라노가 가진 단 하나의 콤플렉스

[퀴지] 그 사람, 워낙 유별나잖아여, 안 그래요?
[르 브레] (애정 어린 어조로) 아! 달 아래 사는 사람 중에 가장 매력적인 친구죠!
[라그노] 시인!
[퀴지] 검객!
[브리사이] 물리학자!
[르 브레] 음악가!
[리니에르] 아무튼 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야! (1막 2장)

<시라노 드 베르주락>(이하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의 베르주락이라는 지역에 살았던 실존인물 시라노에서 영감을 받은 가슴절절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시라노는 뛰어난 검술능력과 언변은 물론 투철한 정의감과 어떤 귀족이나 부자가 와도 꿀리지 않는 당당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소문난, 문무(文武)는 물론 감성까지 갖춘 남자였죠.

[시라노] (어조를 바꾸며 진지하게) 그래, 내가 사랑에 빠졌네. (…)
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네!
(…)
[르 브레] 마그들렌 로뱅, 자네 사촌?
[시라노] 그래, 록산. (1막 4장)

그런 시라노는 자신의 사촌동생 록산을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사촌 간의 연애와 결혼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중세 유럽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답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짝사랑일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는 그가 왜 이렇게 고백을 망설이냐구요? 그건 바로 그가 가진 하나의 아주 큰 약점 때문이었습니다.

[시라노] 가끔 우울한 밤이면 나 자신이 측은해지기도 하지.
그러면 꽃향기 가득한 정원으로 들어가
이 빌어먹을 가엾을 큰 코로 4월의 향기를 맡는다네.
(…) 친구, 나한테도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 있네!
내가 너무나 못생겼다고, 너무나 외롭다고 느껴지는…… (1막 5장)

그것은 바로 크고 못생긴 코를 가졌다는 외모 콤플렉스였는데요. 칼싸움과 말싸움은 물론 시짓기까지 잘하는 무적의 시라노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것도 바로 이 코였습니다. 열세에 놓인 시라노의 싸움 상대들은 언제나 이 코를 공격하며 그를 무너뜨리는 치사함을 보여주기도 하죠.

[시라노] 그 얘긴 그만두고, 당신이 조금 전에 감히 하지 못했던 말부터 해봐요……
[록산] (피를 닦아 주며) 이젠 감히 말할게요. 어린 시절이 그 향기로 용기를 북돋아 주니까! 그래요, 말하죠. 저, 누군가를 사랑해요. (…) 그런데 그 사람은 몰라요.
(…)
[시라노] 이름은?
[록산] 크리스티앙 드 뇌빌레트 남작. (2막 6장)

하지만 표현하지 않는 사랑을 알 순 없는 법. 시라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록산은 야속하게도 시라노를 좋은 친구이자 가족으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록산은 극장에서 만나 한 눈에 반한 남자가 있다고 고백하죠. 시라노와 같은 부대에 속한 아주 잘생긴 군인, 크리스티앙 뇌빌레트입니다. 록산은 크리스티앙과 자신을 연결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되는데요. 사랑하는 마음을 숨긴 시라노는 더없이 비참한 마음이었겠죠. 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이 곧 록산을 사랑하는 일이라 여기며 크리스티앙을 잘 챙겨주겠다고 다짐합니다.

미남과 미녀의 사랑이야기라니, 조금은 뻔하지만 가슴 설레는 로맨스가 시작될 것 같지 않나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아닌 시라노라는 사실을요. 보통의 로맨스에서라면 시라노같은 인물은 서브남주의 역할에 더 가까웠을텐데 말이죠. 서부남주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로맨스라니 점점 더 흥미로워지지 않나요? 과연 이들의 삼각관계는 어떻게 흘러갈지 계속해서 따라가봅시다.


‘뇌섹남’과 ‘얼굴천재’의 사랑 대작전

사실 크리스티앙도 록산과 극장에서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서로의 마음이 이렇게나 잘 맞다니, 이들의 사랑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만 같았죠. 하지만 로맨스에는 언제나 장애물이 등장하는 법이던가요. 바로 ‘얼굴천재’ 크리스티앙이 완벽한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솜씨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앙] 제가 입을 여는 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거나 다름없어요.
[시라노] 뭐라고?
[크리스티앙] 아! 전 부끄러워 죽고 싶을 정도로 멍청하거든요. (…) 그래요, 저에게도 쉽고 군사적인 재치는 있어요. 하지만 여자들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로 변하고 말죠. 오! 내가 지나가면 그들의 눈이 나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
[시라노] 저런! 신의 손이 날 더 공들여 빚어 놓았다 하더라도 난 사랑의 말을 할 줄 알았을 텐데!
[크리스티앙] 오! 감정을 우아하게 표현할 수만 있다면!
[시라노] 지나가는 잘생긴 총사가 될 수만 있다면!
[크리스티앙] 록산은 재녀예요. 분명 난 그녀가 나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을 산산조각 내고 말 겁니다! (2막 10장)

당시에 아름다운 시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특히나 록산은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말할 정도였죠. 반면 ‘뇌섹남’ 시라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크리스티앙의 외면을 너무도 부러워합니다. 크리스티앙의 아름다운 외모와 자신의 언어가 만나면 록산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시라노] 필요한 건 내 머릿속에 다 있으니 자넨 외우기만 하면 되네. 영광을 누릴 절호의 기회가 왔어. 시간 낭비하지 말도록 하세. 인상 좀 펴고. 빨리, 자네 집으로 가세. 내가 말할 걸 일러 줄 테니…… (3막 4장)

여기서 시라노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바로 자신의 언어와 크리스티앙의 얼굴을 합체하는 것이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을 빌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의 말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크리스티앙은 얼굴마담이 되고 싶지 않다며 단호히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언어로 록산에게 고백을 하지만, 그의 짧은 말솜씨에 록산은 전혀 설레지 않는다며 차갑게 반응하죠.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잘생긴 외모마저 못생겨 보일 정도라고 혹평하며 매몰차게 그를 내칩니다.

[크리스티앙] 그래요…… 난 바보가 되어 버렸소.
[록산] (냉랭하게) 그게 마음에 안 들어요! 마치 당신이 졸지에 추하게 변해 버린 것처럼. (3막 5장)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던 시라노는 화려한 언변으로 크리스티앙을 설득한 뒤,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의 성대모사를 하고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것이었죠. 그들이 전하는 사랑의 언어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황홀한 말들인데요. 그중의 일부를 살짝 살펴보면,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만큼 매혹적이랍니다.

[시라노] 난 당신 머릿결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사로잡혀,
태양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다음엔
모든 것에서 붉은 원만 보이는 것처럼,
당신에게서 쏟아지는 그 불빛을 떠났을 때,
눈먼 내 눈길은 모든 것에 금빛 얼룩들을 찍어 놓았소. (3막 9장)

이렇게 얼굴천재와 뇌섹남이 만나 그들은 완벽한 케미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받아들이죠. 정확히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두 사람의 사랑이지만요. 결국 두 사람은 시라노의 도움으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됩니다.


>> ②편에서 계속됩니다

https://brunch.co.kr/@starbook1999/49

▷ 도서 정보

에드몽 로스탕(이상해 역). (1897/2009). 시라노(Cyrano de Bergerac). 열린책들

http://aladin.kr/p/VFLM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