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우스피스》
본 고는 영국의 극작가 키이란 헐리(Kieran Hurley)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마우스피스(Mouthpiece)》를 비평의 대상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부새롬 연출에 의해 2020년 7월 11일부터 9월 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초연했다. 필자는 2021년 11월 12일부터 2022년 1월 30일까지 같은 극장에서 상연된 재연(再演)을 바탕으로 본 고를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말했다.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1] 손택이 탁월한 비평가임과 동시에 극작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말한 ‘문학’에는 희곡, 나아가 연극이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말하기 방식을 찾아가는 것이 연극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이라 할 수 있겠다.
연극은 극장이라는 합의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사회실험이다. 창작자와 실연자, 관객은 상호가 합의한 규칙 아래서 기존의 사회 질서를 전복하고 관점을 재구성하는 서사를 구축해간다. 이 과정에서 여성, 장애인, 빈민, 성소수자, 이주민 등의 약자들은 현실에서 얻지 못한 발언권을 가진다. 사회적 주변부에 머물렀던 이들은 서사의 중심에 서서 주인공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는 셈이다. 젊은 연극인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아주 높이 평가할 만한 지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들은 정말 주인공이 되어 있는가? 연극은 그들의 서사를 진정으로 담아내고 있는가? 특히 현실 속 그들의 무대 위에서 ‘재현(再現)’해야 하는 연극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재현의 윤리에 대한 더 본질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연극이 단순히 그들을 대상화하고 재현하는 데에서 그치고 있는지, 혹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며 그 이상의 메시지를 추구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마우스피스》는 연극에게 질문을 던지는 연극이다. 이 작품은 극작가 리비 퀸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빈민 소년 데클란 스완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의심의 과정으로써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우리가 지금껏 들어왔던 연극 속 약자의 목소리에 또 한번 ‘이의를 제기’한다. 재현의 과정에서 연극은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연극이 지키지 못한 약자들과의 약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리비와 데클란의 2인극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두 사람의 독백과 대화를 교차시킨다. 대화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둘 사이의 간극이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과정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 속에서 교감은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새롬 연출과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연극열전의 《마우스피스》는 이들 간의 교감을 계속해서 가로막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의미적으로는 이어지지만, 그 사이의 교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고 그 말에 대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은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내뱉는 것에 가깝다. 둘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주 잠시, 미술관을 찾아 전시를 관람하는 순간에 불과하다. 미술작품이라는 매개가 존재할 때를 제외하면 이 작품은 인물 간의 교감이 부재한, 두 사람이 각자 꾸며내는 모노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진다.
아주 거칠고 딱딱한, 상처로 인해 자신을 뾰족하게 보호하는 데클란은 미끄러질 듯 여유롭게 흐르는 리비에게 전혀 녹아들지 않는다. 반면 데클란이 리비에게 다가갈 때면, 리비의 매끄러운 태도가 그를 미끄러져 나가게 한다. 한병철은 매끄러움은 오늘날 미적 판단을 위한 잣대로 여겨지는 ‘매끄러움’이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름답게 여겨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하며,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 특히 매끄러움은 ‘만지고 싶다’는 촉각의 열망을 일으킴으로써 미적 판단에 필요한 관조적인 거리를 소거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루어져야 하는 예술적 판단에 실패하는 셈이다. [2]
리비는 어른의 능숙함과 매끄러움으로 데클란의 상처를 끌어안으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오로지 자신만의 입장에서 데클란을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된 행동일지 모른다. 그의 매끄러움이 예술적 판단을 방해함으로써, 그는 예술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데클란의 삶에 다가가고 그의 이야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마침내 리비는 데클란의 삶을 통해 신작에 대한 영감을 마주한다.
매끄러움과 뾰족함 사이에서 접점을 찾지 못한 이들의 대화는 결국 리비의 희곡 《마우스피스》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진다. 연극 속에서 새로운 연극이 등장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연극의 책무를 조망하는 메타-연극(meta-theatre)으로 확장된다.
리비는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희곡 『마우스피스』로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데클란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리비는 데클란과 만나 이 연극이 데클란과 같은 아이들의 빈곤을 사회적으로 알리기 위한 선의의 행위라는 점을 어필하고자 한다. 그러나 데클란은 리비를 만나기를 거부한다. 연극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 두 사람은 결국 만나지 못한 채, 리비는 결국 자신의 희곡을 무대 위에 올린다.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 앞에서, 데클란은 자신의 무대에 오른 자신의 이야기를 마주하기 위해 객석에 입장하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극장 안과 밖 사이에는 입장료라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한다. 리비와의 심리적 교감이 이루어진 미술관이 무료였다는 점과 아주 대조되는 지점이다. 결국 그는 공연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공연 종료 후 진행되는 ‘관객과의 만남’ 시간을 통해 리비와 재회한다.
데클란은 리비가 이것이 자신의 이야기이고, 자신과 함께 만든 이야기임을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리비는 데클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희곡임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희곡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데클란의 심리 상태와는 무관하게 관객들은 데클란에게 동정이 섞인 찬사를 보낸다. 이 모든 상황을 견디지 못한 데클란은 결국 몸과 마음이 모두 상처투성이가 된 채 피를 흘리며 극장 밖으로 달아난다. 리비는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무대 위에 꿋꿋이 앉아 자신의 희곡을 지키고, 데클란이 나간 후에도 연극은 극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연극과 연극인은 극장에 남아있지만, 약자는 달아나버린 상황.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겠다 선언하지만 제작과정 어디에도 약자의 참여가 보장되지 않은 연극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마주한다. 극장 밖으로 밀려난 데클란과 그 안을 지키는 리비, 이들을 객석에서 관조하는 관객들의 모습은 약자의 목소리가 공허한 껍데기만 남은 연극의 초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데클란의 빈곤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싶다는 리비의 선의는 무엇 때문에 공허한 껍데기가 되어버렸을까? 약자의 목소리가 함께 하는 연극을 위해서 연극인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마우스피스》는 ‘동의’의 방식에 주목한다.
한국어로는 똑같이 ‘동의’로 번역되지만, 영어에는 서로 다른 ‘동의’의 개념이 있다. agreement와 consent가 그것이다. agreement는 대화 전부터 이미 두 사람이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을 명시적으로 확인하는 ‘수용’의 과정이다. 하지만 consent는 상대방이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3]
consent는 더 날카로운 의심을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정말 나에게 허락해준 것이 맞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실제로 consent는 성관계 의사에 대한 동의를 표현할 만큼 아주 엄격한 수준의 의심과 허락을 필요로 한다. [4] 리비와 데클란이 서로에게 잠시나마 성적 매력을 느꼈으나, 성관계가 이루어지기 직전 리비가 이것을 중단하는 장면은 consent가 부재한 상황에 대한 암시라고 할 수 있겠다.
소년과의 성관계에 윤리적 부담을 느낀 리비도 자신의 창작 활동에서만큼은 consent의 필요성을 망각한다. 그는 데클란이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옮긴 것일 뿐이라 말하지만, 데클란은 단 한 번도 리비에게 그 이야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의 의사를 표한 적이 없다. 리비는 자신과 데클란의 감정적 교감에서 그것에 대한 동의까지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고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심은 과한 확신으로 이어졌고, 자신의 이야기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데클란의 태도에도 이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의 작품이니 창작과 공연을 이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선술했듯이 consent는 끊임없는 의심의 과정이다. 정말 이 동의에 그 사람의 주체적 의사가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하며, 더 이상 의심을 할 수 없을 수준까지 그 고민이 이어져야 한다. 이것을 놓친 리비의 《마우스피스》는 결국 데클란의 진정한 목소리는 사라져버린 채 껍데기만 남은, 빈곤의 목소리를 담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연극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렇듯 언제나 의심하고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는 연극의 책무를 망각하는 순간, 연극은 그저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표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선술했던 문장 바로 앞에서 작가의 책무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그는 작가에 대해 “옳은 잃을 하거나 지원해 주려 애쓰는 사람보다 훨씬 더 회의적이며, 훨씬 더 스스로를 의심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5] 리비가 놓친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리비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며 데클란에게 더 나은 인생을 선사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선의에 대한 마음이 아닌,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회의였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너무도 확신했고, 그 확신으로 만들어낸 작품은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그 영광은 리비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만약 리비의 이야기가 회의적 시각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가 받은 박수를 데클란과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리비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연극인, 나아가 모든 예술인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만들어낸 창작물 속 약자가 당신의 선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법학자 에이미 추아(Amy Chua)에 따르면 “소수 집단에게 고마워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시혜자가 준 것에 감사하라는 의미고 당신이 빚을 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6] 동의(consent)가 전제되지 않은 선의는 그저 복종에 대한 요구일 뿐이다.
그 인물이 작품 속에 머물지 않고 사회에서 진정한 목소리로 거듭나기 위해선 작가의 의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 인물을 작품 밖으로 구출해내야 한다. 작품 속에만 갇혀버린 약자의 목소리는 당신에게 종속되는 소재에 불과해진다.
《마우스피스》가 공연되었던 대학로 극장 밑 지하에선, 이동권 투쟁을 위한 장애인 단체들의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피켓의 형태로 그곳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위의 지상에서 벌어지는 대학로의 연극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는가. 오늘의 연극은 약자의 진정한 동의(consent)와 함께하고 있을까? 연극 속 목소리는 극장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세상으로 뻗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우리는 의심을 멈출 수 없다.
[1]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서울: 이후, 2004), 207
[2]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6), 9-12
[3] Cambridge dictionary에서는 agreement의 동사형인 agree를 “to have the same opinion(같은 의견을 가진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반면 consent의 경우 “permission(허가)”라는 개념을 활용해 설명한다.
[4] “한국에서 성적 동의를 정의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노 민즈 노(no means no(non-consent, 부동의))’ 와 ‘예스 민즈 예스(yes means yes(affirmative consent, 적극적 동의))’이다.” (유하원, “20대 성적 실천에서의 성적 동의 경험 연구”, (서울: 서강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2), 9)
[5] 수전 손택, 앞의 책, 207
[6]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 (서울: 부키, 2020), 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