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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비 Dec 06. 2015

너를 눈길로 어루만진 마지막 날로부터

개발자 남자친구 전상서

마지막으로 널 만난 지 2주가 넘었다. 우리는 롱디도 아니고, 만난 지 오래 된 사이도 아니며, 출장이 잦은 직업을 갖고 있지도 않다. 다만, 네가 좀 과하게 바쁠 뿐이다. 


개발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가. 퇴근 시간은 저녁 먹는 시간을 의미하고 자정은 샤워하고 조각잠을 자는 시간이며 출근 시간은 세수하고 이를 닦으며 정신을 차리는 시간에 불과하다. 시간의 흐름은 마감의 임박을 의미하고 주말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편히 일할 수 있는 날을 의미한다. 


이러다가 너는 사람이 아니게 될 지도 모른다. 찰싹 달라붙은 다크써클이 점점 커진다면 아마 머지않아 팬더가 되겠지.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팬더가 된다면 일도 하지 않고 뒹굴뒹굴 놀면서 대나무 잎만 씹어먹으면 그만이다. 귀찮아서 짝짓기도 안한다는 팬더라면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다.


못 만난 게 2주일일 뿐, 네 야근 행진은 이제 한 달을 넘었다. 이게 사람 사는 거냐고, 헛웃음 소리에 흩어지는 피로가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왜 이러고 사냐, 하고 내쉬는 한숨이 전화선을 묵직하게 흔들었다. 그러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최근의 너는, 달콤한 말이 오갔던 이틀 전의 통화와 매일 네게서 걸려오는 짧은 전화 뿐이다. 가끔 전송하는 사진으로 내 안부를 전하지만 데이터로는 충족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풍기는 비릿한 담배냄새, 귀 뒤에서 퍼지는 달콤한 향수, 잡티 없이 뽀얀 피부에 톡 톡 떨어진 먹물같은 작은 점, 맞댄 살갗 사이로 느껴지는 열기.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내 방을 가득 메웠다. 그래서 창문 틈새로 날아가 너 있는 곳 까지 닿을 수 있게 계속 생각하기로 했다. 사무실 입구의 유리문을 똑똑 하고 노크하면 네가 열어주겠지, 그러면 나는 아닐지라도 내 생각만큼은 너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4층이라고 헀지, 4층 사무실 안의 왼쪽 가장 구석진 자리, 파란 잎파리 아래 숨겨진 흰 책상.



마감이 내일인데, 너는 여전히 바쁘다. 저녁은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묻고 싶지만 이마저도 방해일까 싶어 메시지도 하지 못하고. 참 다행히도 네가 바쁜 동안 나도 할 일이 많았다. 정말로 다행이지. 예전 같았다면,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리석고 서툴던 때였다면 너를 많이 괴롭혔을 것이다. 가슴이 뛰던 때는 그만큼 예민하고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였던 내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가슴 뛰는 사랑은 유니콘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대신 차분함과 신중함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야 널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네 손가락에 몇 가닥의 털이 났는지 잊을 정도로 오래 만나지 못했지만, 어쩌면 곧 만나게 되는 날 울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네가 아프다고 했던 날 방에서 홀로 울었던 건 비밀이지만, 현관에 신을 벗고 좁은 복도를 지나 마주치는 잿빛 소파에 누워 곤히 잠든 너를 마주하게 되는 날을 항상 기다렸다고, 꿈에 나오지 않아 원망스러울 정도로, 천장 가까이에 자리한 길고 좁은 창으로 쏟아지는 날카로운 햇빛이 네 눈에 닿지 않게 손으로 가려주었던 그 저녁이 너무나 그리웠다고, 두 손 꼭 잡고 너무나 보고싶었다고, 숨이 찰 정도로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던 모든 말들을 네게 속삭여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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