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언어들

[오늘도, 사람!]

by 별체



최는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태어난 이후부터 쭉 조부모와 부모에게 존댓말을 쓰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런데도 자꾸만 ‘저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의 ‘제가’를 항상 ‘저가’라고 말했다. 몇 번씩 정정해 줬지만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최가 잘못된 언어습관을 고칠 생각이 없었다. 이유를 묻던 날, 최는 이렇게 대답했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배운 말이라서.”



바쁜 부모 덕분에 최는 주로 조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전라도에서 올라오셨던 최의 조부모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늘 ‘저가요’라고 말했고, 최는 자연스럽게 그 말을 따라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 표현이 잘못된 걸 알았던 날, 최는 조부모에게 ‘제가요’가 맞는 말이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조부모는 잠깐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최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며 칭찬했다. 하지만 최는 그 찰나의 순간의 어색한 분위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할머니의 서운한 마음이 단번에 드러난 표정은 조부모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계속 생각난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저가’를 쓰는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고 했다. 최에게 ‘저가’는 조부모에 대한 사랑이었다.



음악을 전공했던 준은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피아노, 기타, 베이스, 우쿨렐레, 드럼, 플룻 등을 수준급으로 연주했고 당연히 작곡에도 소질이 있었다.



화가인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림도 무척 잘 그렸다.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체로 생각한 것을 순식간에 그려내는 재능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꾸준히 독서모임을 가지고 글을 쓰거나 사색하는 것을 즐겨했다. 즉, 무언가를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타고난 준은 한 마디의 말을 꺼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한 것을 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움직였지만, 말로 표현하라고 하면 한참의 공백이 생겼다.



말을 시작해도 느릿한 속도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고, 중간중간 쉼표도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준이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은 높은 편이었고, 조리 있게 말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언제나 무게감이 있었다.



나는 그가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며 권유했지만 그는 말로 지을 업(보), 특히 악의 무게를 감당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준에게 말이란 ‘업보, 카르마’였다.



진은 어린 시절부터 고생이 많아 어지간한 일에는 무덤덤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삶을 안정적이라고 느끼며 타인에 대한 관심도 적고 궁금한 것도 많지 않다. 그래서 진은 언제나 말하는 자이기보다는 듣는 자였다.



그런 진도 내게 질문이란 걸 쏟아낼 때가 있다. 물론 그 질문조차 내 예상을 벗어난 경우는 거의 없지만.



진은 늘 내가 식사를 했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에 대해 묻는다. 식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식습관이 불규칙한 나의 건강을 나보다도 더 걱정한다.



맛집에 관심도 없는 내게 늘 맛집 이야기를 꺼내고, 단 것만 먹지 말고 건강한 음식 좀 챙겨 먹으란 잔소리도 빼놓지 않는다. 진에게 음식의 언어란 ‘우정’이었다.



린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며 마무리도 깔끔하게 하는 편이었다. 순발력이 좋고 상황 파악도 빠르게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견을 논리 정연하면서도 위트 있게 말하는 것에 탁월했다.



린은 거의 모든 문장에 ‘~한 것 같습니다.’ 혹은 ‘그렇지 않을까요?’라는 완곡한 표현을 썼다. 상대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수가 많고 남을 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린은 주로 남을 위하는 언어를 사용했다. 린에게 말이란 ‘배려’였다.



누군가가 가진 언어의 특징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그 사람의 세계와 한 뼘 더 가까워진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아갈 때마다 바라게 된다.



그들의 언어들을 소중히 품고 오래도록 걸을 수 있기를. 더 많은 언어의 의미를 마주하며 기록할 수 있기를. 나의 언어 또한 당신들의 마음에서 명징하게 떠오르기를.




23년 3월 2일 목요일




* [오늘도, 사람!]은 뚜밍이가 진행하는 매일 에세이 연재 프로젝트로, 대체로 사람을 좋아하고 가끔 싫어했던 기억을 늘어놓습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니 읽는 데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 죄송합니다. 어제 3월 1일, 급작스러운 위경련으로 연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위장 질환이 원래 잦은 편이긴 한데, 어제는 전조증상도 없이 대처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응급실 방문까지 했네요..



건강 관리에 조금 더 신경 써서 추후 연재에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쓰지 못했던 글은 3월 4일 토요일에 추가 발행하겠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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