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길을 찾다
한 문장으로 나를 설명하자면,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나 공부만 열심히 하던 전형적인 '계룡녀'로서 지반공학을 전공하고 23년째 건설 현장을 누비고 있는 중3 아들의 엄마다.
대학 시절, 특별한 목표 없이 "돈을 잘 벌 것 같아서" 선택했던 토목공학이었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 운명이 나에게 보낸 강력한 신호였다. 사주팔자 여덟 글자 중 절반이 '흙(土)'으로 가득 찬 내가 평생 흙의 성질을 연구하고 땅 밑을 파헤치는 지반공학자가 된 것. 이것이야말로 내 사주에 넘치는 기운을 가장 가치 있게 써먹는 '물상대체(物象代替)'의 삶이었다.
사주에서 흙의 기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산인 무토(戊土)와 만물을 길러내는 야무진 땅인 기토(己土)다. 나는 사주에 기토가 두 개가 있을 뿐 아니라 지지에 축토에 미토까지 총 네 개의 토를 가지고 있다(사주구성의 50%가 토라는 뜻).
지반공학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내력(Bearing Capacity)'이 엄청나게 강한 땅이다. 웬만한 하중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만의 고집과 주관으로 세상을 버틴다. 하지만 사주 공부를 하기 전의 나는 그저 '바싹 마른 고집불통의 흙덩어리'일뿐이었다. 함수비가 없는 흙은 아무리 두드려도 다져지지 않고 부서지기만 하듯, 나 역시 나만의 세계에 갇혀 주변과 섞이지 못했다.
사회생활의 첫발은 부산의 항만 현장이었다. 바다 밑에 쌓인 연약한 해성점토를 단단한 지반으로 개량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물기를 가득 머금어 흐물거리고, 조금만 무게가 실려도 푹 꺼져버리는 그 흙을 보며 나는 나의 이십 대를 떠올렸다. 방향을 잡지 못해 질척이던 감정과 불투명한 미래에 흔들리던 나날들.
흥미롭게도 내 사주 명식에는 기토(흙) 옆에 늘 계수(癸水)라는 물이 흐르고 있다. 지반공학 전문가의 시선으로 보니, 이 계수는 내 인생의 '용신(用神, 나를 돕는 기운)'이자 '최적 함수비'였다.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적당한 물기가 필수적이다. 현장에서 물 머금은 흙과 씨름하며 그 물기를 조절해 단단한 인프라를 구축해 가는 과정은, 곧 내 안의 고집(흙)을 유연함(물)으로 다듬어가는 성인식이었다. 23년의 직장 생활은 나에게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나'라는 거친 지반을 사회라는 거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공학적 지반'으로 개량해 가는 과정이었다.
사주에 흙이 많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견딜 힘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힘은 혼자 잘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물기를 받아들여 유연해질 때, 비로소 땅은 생명력을 얻고 그 위에 거대한 지하 공간도, 높은 빌딩도 세울 수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점쟁이의 예언이나 세상의 잣대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이 묵직한 토(土) 기운을 어떻게 세상에 이로운 인프라로 치환하느냐는 것이다.
올해 병오년(丙午年), 뜨거운 화(火)의 기운이 나를 비춘다. 나는 이 열기를 동력 삼아 내 인생의 지반 공사 기록을 문장으로 굴착하려 한다. 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배수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지내력을 높이는 작은 가이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