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지반공학자의 명리(命理) 일기

흙에서 길을 찾다

by 지반공학자 쏘야

1. 23년 차 엔지니어, 흙을 전공하고 사주를 읽다


한 문장으로 나를 설명하자면, 경상도 시골에서 태어나 공부만 열심히 하던 전형적인 '계룡녀'로서 지반공학을 전공하고 23년째 건설 현장을 누비고 있는 중3 아들의 엄마다.


대학 시절, 특별한 목표 없이 "돈을 잘 벌 것 같아서" 선택했던 토목공학이었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은 내 운명이 나에게 보낸 강력한 신호였다. 사주팔자 여덟 글자 중 절반이 '흙(土)'으로 가득 찬 내가 평생 흙의 성질을 연구하고 땅 밑을 파헤치는 지반공학자가 된 것. 이것이야말로 내 사주에 넘치는 기운을 가장 가치 있게 써먹는 '물상대체(物象代替)'의 삶이었다.


2. 무토(戊土)와 기토(己土), 당신은 어떤 땅입니까?


사주에서 흙의 기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거대한 산인 무토(戊土)와 만물을 길러내는 야무진 땅인 기토(己土)다. 나는 사주에 기토가 두 개가 있을 뿐 아니라 지지에 축토에 미토까지 총 네 개의 토를 가지고 있다(사주구성의 50%가 토라는 뜻).


지반공학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내력(Bearing Capacity)'이 엄청나게 강한 땅이다. 웬만한 하중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나만의 고집과 주관으로 세상을 버틴다. 하지만 사주 공부를 하기 전의 나는 그저 '바싹 마른 고집불통의 흙덩어리'일뿐이었다. 함수비가 없는 흙은 아무리 두드려도 다져지지 않고 부서지기만 하듯, 나 역시 나만의 세계에 갇혀 주변과 섞이지 못했다.


3. 해성점토의 물기를 짜내며 배운 '최적 함수비'의 인생론


사회생활의 첫발은 부산의 항만 현장이었다. 바다 밑에 쌓인 연약한 해성점토를 단단한 지반으로 개량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물기를 가득 머금어 흐물거리고, 조금만 무게가 실려도 푹 꺼져버리는 그 흙을 보며 나는 나의 이십 대를 떠올렸다. 방향을 잡지 못해 질척이던 감정과 불투명한 미래에 흔들리던 나날들.


흥미롭게도 내 사주 명식에는 기토(흙) 옆에 늘 계수(癸水)라는 물이 흐르고 있다. 지반공학 전문가의 시선으로 보니, 이 계수는 내 인생의 '용신(用神, 나를 돕는 기운)'이자 '최적 함수비'였다.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적당한 물기가 필수적이다. 현장에서 물 머금은 흙과 씨름하며 그 물기를 조절해 단단한 인프라를 구축해 가는 과정은, 곧 내 안의 고집(흙)을 유연함(물)으로 다듬어가는 성인식이었다. 23년의 직장 생활은 나에게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나'라는 거친 지반을 사회라는 거대한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공학적 지반'으로 개량해 가는 과정이었다.


4. 지반공학자의 명리일기: 지반이 단단해야 건물이 올라간다


사주에 흙이 많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견딜 힘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힘은 혼자 잘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물기를 받아들여 유연해질 때, 비로소 땅은 생명력을 얻고 그 위에 거대한 지하 공간도, 높은 빌딩도 세울 수 있다.


이제 나는 안다. 점쟁이의 예언이나 세상의 잣대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이 묵직한 토(土) 기운을 어떻게 세상에 이로운 인프라로 치환하느냐는 것이다.


올해 병오년(丙午年), 뜨거운 화(火)의 기운이 나를 비춘다. 나는 이 열기를 동력 삼아 내 인생의 지반 공사 기록을 문장으로 굴착하려 한다. 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배수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지내력을 높이는 작은 가이드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