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탐사일지 37화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었다.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호기심이 나를 떠나게 만들었고,
모험심이 낯선 길로 이끌었으며,
그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하리라 믿었다.
내가 모르는, 나를 모르는 낯선 곳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맛보고 싶다는 마음. 언제나 그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이번 여행도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작했다. 길 위에서 친구들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누렸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딸을 만나는 행운까지 얻었다.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였기에 혼자였다면 보지 못했을 결의 추억들이 쌓였다.
생전 처음 발 디딘 도시의 목록도 늘어났다.
파도바, 피란, 루블랴나, 트롬쇠, 말뫼, 코펜하겐... 그리고 이름조차 낯선 작은 마을들까지. 그곳의 미술관과 도서관, 왕궁과 동시대 최고 건축가들이 남긴 수려한 건축물들. 좁은 골목과 정겨운 집들, 초록 공원과 깊은 숲, 투명한 호수, 그리고 웅장한 알프스와 겨울 바다. 그 모든 풍경은 제각각 독특하고 아름다운 결로 나를 매혹했다.
무엇보다, 오로라.
북극 밤하늘을 수놓은 오로라 댄싱을 영접했으니, 이만하면 참 멋진 여행이었다.
그리고 무탈하게 잘 돌아왔으니 다행이었다.
왜 그토록 오로라를 보고 싶어 했을까?
버킷 리스트의 가장 높은 곳에 항상 머물러 있기도 했지만, 오로라를 마주하는 순간 어떤 강력한 영감이 나를 깨워줄 거라 기대했었다.
에피퍼니(Epiphany).
낯선 길 위에서 마주치는 찰나의 깨달음 같은 것 말이다.
오로라를 본 그 밤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설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기대했던 에피퍼니는 오지 않았고, 오로라는 내 삶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지구에서만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우주쇼를 목격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에 대해 새로 발견한 것들도 있었다.
건강만큼은 타고났다고 자부했건만, 여행 도중 속절없이 골골거리며 앓아누웠다.
스스로 즉흥적이고 무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철저한 안전제일주의자였다. 때로는 지독한 결정 장애자이기도 했다. 비행기로 대륙과 유럽을 가로지르면서도 몇 유로의 버스 값을 따져보다 끝내 걸어버리는 해괴한 경제관념 보유자였다.
피렌체의 세탁소에서 툭 터져버린 울음, 천둥이 몰아치던 파도바 다락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려 있던 나를 떠올리면, 그게 정말 나였나 싶다.
무엇보다 압권은 글쓰기였다. 무언가 쏟아낼 것만 같아 휴대폰용 자판기까지 공수해 왔건만, 여행 내내 단 한 자도 쓰지 못했다.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재의 나였다.
더 늦기 전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어 회사도 그만두었다. 괜찮은 일자리 제안도 흘려보냈다. 멀티 플레이가 안 되는 나이기에, 스스로를 코너로 몰아넣듯 여기까지 왔다.
무언가 써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벌인 선택이었고, 그것이 내가 찾은 길이라 여겼다.
여러 달을 궁싯거리며 글을 쓰는 동안 몰입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쓰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렀고, 노트북에는 여러 편의 글이 쌓여갔다. 하지만 제대로 배운 적 없는 내 글은 늘 어딘가 부족했고 아쉬웠다. 금세 빛을 볼 줄 알았건만, 내 글을 읽어줄 독자 한 명 구하기가 이토록 힘들 줄이야.
무엇보다 오로지 혼자서만 견뎌야 하는 고독한 시간들이었다. 지긋지긋했던 조직 내 정치도, 동료들과 티키타카도 그리웠다.
매일 서울 읍내 같은 동네에 틀어박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내가 절대 잘할 수 없는 일에 발을 잘못 들인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의 미래가 자못 궁금했다. 어쩌면 도피하듯, '영감을 얻겠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방패 삼아 글만 쓰는 루틴에서 벗어났다. 내 미래를 비춰줄 팔란티르를 찾아서, 그렇게 수많은 도시를 헤맸다.
이제는 돌아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달리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여전히 글로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있었다. 긴 여정 끝에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욕망의 재발견'이었다.
지금 이 길을 포기하는 것보다 힘든 건, 좋아하지 않는 척 나를 속이는 일이었다. 잘 해내야 한다는 초조함 대신, 그저 쓰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이 마음을 긍정하기로 했다.
오로라 아래서도 찾지 못한 답을, 이 비좁은 모니터 앞에서 다시 찾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동력이 되는, 나만의 우주를 향해.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듯, 이 마음 역시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지구인이라서, 지금이라서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쓰며.
누군가 그 이야기에 잠시 머물러 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나는 브런치를 시작했다.
오로라를 만나러, 그리고 어쩌면 팔란티르를 찾아 떠났던 긴 여행.
그 길 위에 함께해 준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