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운 연인, 암스테르담

지구별 탐사일지 37화

by Stardust


암스테르담의 물가는 잔인했다. 결정장애 끝에 급하게 구한 호스텔 6인실의 이층 침대 하나가 100유로를 훌쩍 넘겼다. 다행히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설도 깔끔했고, 분위기도 힙했다.


동네가 한산해 보여, 저녁은 시내로 나가 먹기로 했다. 아뿔싸. 한 달 넘게 들고 다니던 분신 같은 가방끈이 툭 떨어졌다. 내 안의 여행 세포 하나도 함께 끊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에 가방을 꼭 끌어안고 기억 속 중식당을 찾았다. 그새 유명해졌는지 줄이 길었다. 오래 기다린 보람도 없이 메뉴 선정에 실패해, 맵고 양만 많은 닭튀김 요리로 배를 채웠다.


바로 옆자리에서는 비즈니스 협상이 한창이었다. 투자를 유치하려는 사람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투자자.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식당 안에 그대로 울렸다. 투자자를 설득하려는 쪽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질문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결국 계산을 하려던 그에게서 지갑이 다시 들어갔다. 가망 투자자가 조용히 현찰을 내려놓았다.

그들의 협상도 썩 잘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밤바람은 차고, 왕궁 앞 붐비는 사람들 사이 우두커니 섰다. 다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아침에 코펜하겐에서 보았던 윤슬과 블랙다이아몬드는 벌써 먼 이야기 같았다. 호스텔이 있는 동네는 컴컴했고 위험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좁은 침대 칸막이 안으로 숨어들었다. 낯선 이들의 숨소리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 어디 가지?

고흐 미술관, 국립 미술관, 왕궁, 운하…

이 도시는 나에게 너무나 익숙했다. 고흐 미술관의 강렬한 붓 터치도, 미로 같은 운하의 낭만도, 화려한 왕궁의 위용도 이미 여러 번의 발길로 궁금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뒤척이던 내 머릿속에는 이 도시를 거쳐 간 익숙한 이름들이 떠올랐다.

가죽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몰며 금기된 자유를 만끽하던 올리버 색스의 거친 에너지. 삶의 마지막 선택지를 쥐고 안락사를 꿈꾸던 이언 매큐언의 서늘한 냉소. 그들의 흔적이 이 운하 어디쯤 흐르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올리버처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용기도, 매큐언의 주인공들처럼 치열한 도덕적 사투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여행자의 호기심이 벌써 식어버린 걸까?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암스테르담이 권태로운 연인처럼 느껴졌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한 번 더 보고 싶긴 한데... 세렌디피티를 기대하기엔 너무 지쳐버린 여행자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비좁은 6인실에서 깊은 잠을 잤다. 오로라를 타고 날아오르거나 피렌체의 두오모를 오르는 꿈까지 꾸면서.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세상의 채도가 달라져 있었다. 어젯밤의 불안이 무색하게 동물원 옆 고즈넉한 동네에는 단정한 주택가와 평화로운 산책로가 펼쳐져 있었다. 깊어가는 가을, 단풍 든 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흔들렸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동물원 근처의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고.



부티크와 편집숍이 모여 있는 감각적인 동네로 향했다. 천천히 걸었다. 마음에 드는 가방도 찾았다. 끊어진 가방 대신 새 가방을 메고 운하 옆 독특한 건물, A'DAM Lookout의 루프탑에 올랐다. 눈앞에 넓은 운하와 도시 전경이 펼쳐졌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칠 때, 나도 모르게 "야호!" 하고 작게 외쳤다.

그것은 거창한 예술적 감동도, 철학적 사유도, 퀘스트를 깨는 여행자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상쾌한 확인이었다.



오후 세 시 반. 새로운 곳에 가기에 늦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시간.

그간 결정장애였던 내가 드디어 마음을 정했다. 오로지 '맥주'였다. 그것도 '암스테르담다운' 맥주집에 가야 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수제 맥주 양조장 중 하나인 브루어리 트 아이(Brouwerij ’t IJ)로 향했다.

도착하니 오후 다섯 시.

어린 시절 보았던 동화 속 풍차는 아니었지만, 도심 속 풍차의 거대한 날개 아래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가 어제의 기분을 말끔히 씻어주는 듯했다. 선술집의 소란스러운 바이브 속에 섞여 소시지와 맥주를 들이켰다. 어떤 맥주를 골라야 할지 몰라 5종 샘플러 메뉴를 골랐다.

색색깔 다른 맛.

그래, 바로 이 맛이야!

5개 맥주 모두 별 다섯 개였다.

장인이 수제로 만들었다는 짭짤하고 육즙이 풍부한 소시지도 일품이었다. 알싸한 취기가 올라오자 모든 것이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운하 옆 풍차에서 햇살을 받으며 쌉싸름한 맥주까지.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암스테르담은 더 이상 탐험의 도시가 아니었다.

새로운 것 없이도 편안한, 그저 천천히 다시 걷게 하는 오랜 친구 같은 도시였다.


그날 밤 나는 비행기를 탔다.

긴 여행의 마지막 도시는 그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