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뫼와 블랙 다이아몬드

by Stardust


코펜하겐은 덴마크 본토가 아닌 젤란 섬에 있는 수도다. 여러 개의 다리로 다른 섬과 도시와 연결되어 있는데 스웨덴 말뫼도 그중 하나다. 우연히 영상으로 보게 된 외레순 다리. 바다 위를 가로지르던 길이 돌연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기묘한 풍경. 그 '사라지는 길'에 매료되어 버린 나는 스웨덴 말뫼행 기차를 탔다.



쾌속으로 달리는 기차는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감흥을 즐길 새도 없이 빠르게 해저 터널로 진입했다. 여느 터널과 비슷했다. 하긴, 수족관처럼 고래나 물고기들을 보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여권 검사도 없이 국경을 넘었다. 외레순 다리는 코펜하겐의 비싼 물가를 피해 말뫼에 살면서 정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말뫼에서 정말 맛있는 미트볼을 먹었다. 미트볼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확 바꿔줬다. 바닥까지 싹싹 비운 후, 말뫼의 오래된 카페에서 피카를 즐겼다. 내 옆자리에는 스웨덴 청춘 셋이서 체스를 두고 있었다. 대결이라도 하는지, 숨죽이며 집중하다가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두는 그들 덕에 조용히 커피 맛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칫 잠 못 드는 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긴 여행도 막바지였다.



아름다운 구도심을 지나 공원과 강을 가로질러 말뫼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건축가 헤닝 라르센(Henning Larsen)이 설계한 신관은 "빛의 달력"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따라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달라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시간을 기록하는 달력 같다는 의미라고 한다.

4층 건물 한쪽 벽면 전체가 거대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북유럽의 짧고 낮은 햇살이 도서관 깊숙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공원의 울창한 나무들이 보여,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계절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채광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간절히 무언가를 읽고 싶었다.

한 소절이라도.

머나먼 이국적인 공간에서 가장 익숙한 문장을 만나고 싶었다. 빛의 달력 어딘가에 꽂혀 있을 한강의 소설을 찾아 헤맸지만, 이미 누군가의 품에 안겨 떠난 뒤였다. 아쉬움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내가 읽지 못한 한강의 문장을 스웨덴의 누군가가 빛 아래서 읽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게 나는 책 대신 빛의 독자가 되어 보았다.



말뫼의 빛으로 가득한 도서관을 나오며 생각했다. 북유럽 사람들은 책을 읽기 위해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공간을 만드는 걸까. 그 질문은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떠나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숙소인 호텔이 바다를 따라 이어진 데크 산책길과 연결된다는 걸 알았다. 해도 쨍한 아침. 40분 정도 걸어 바다 운하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갔다.

청량한 바람과 햇살이 부서지는 바닷가 산책로는 즐거웠다. 10월 말의 차가운 바다에 입수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 햇살을 쬐며 책이나 음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 아침 일찍 요트를 타는 사람들...



나는 걷다가 뛰다가, 음악을 듣다가, 도시 소음과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카페에 도착했다. 커피는 훌륭했고, 인테리어는 감각적이었다.

창가 독특한 유리 전등이 상상의 나래를 자극해, 문득 팔란티르 구슬이 떠올랐다. 차오르는 느낌에 이끌려 그 영롱한 빛 앞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이 여행의 파편들이 비로소 문장으로 엮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여행 에세이도 그날, 그 빛 아래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행선지인 코펜하겐 왕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며칠 전 도서관 1층 카페에 들렀다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엔 덴마크 모던 디자인이 건축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여러 층을 가로지르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돌아보니, 거대한 창밖 운하 건너편에 돛단배 기둥을 닮은 붉은 다리가 보였다. 시간이 스며든 책장 너머로 탐구하고 토론하는 학생들, 그리고 열람실 곳곳에 놓인 저명한 디자이너의 의자들이 이 근사한 공간에 머물러 사유하게 만들었다.



도서관의 별칭은 블랙 다이아몬드(The Black Diamond). 마치 첩보 영화 속 주인공의 코드네임처럼 들린다. 짐바브웨에서 들여온 블랙 화강암과 유리가 햇빛과 바다를 머금어 반짝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바다 건너 빨간 다리 위에서 본 블랙 다이아몬드는 정말 SF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항구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검은 거체는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확장되어 아찔하고 독특한 심미적 긴장감을 선사했다.

아침 햇살에 윤슬이 부서지듯 번지자, 유리 벽에 비친 바다와 하늘이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되어 반짝였고, 항구의 알록달록 배들은 그 풍경에 생동감을 더했다.


말뫼의 도서관이 햇살을 안으로 품어 인간을 비춘다면, 코펜하겐의 블랙 다이아몬드는 바다와 하늘을 제 몸에 반사하며 도시 전체를 반짝이게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배를 탄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괜히 손을 흔들어 본다.

보이지 않는 국경을 넘고, 바다 위와 아래를 가로지르며, 빛을 읽고 바다를 숨 쉬던 시간들.


안녕, 코펜하겐.

또 보자, 블랙 다이아몬드.

지구인의 코펜하겐 산책이 반짝이며 끝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