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에서 만난 블루 아워

지구별 탐사일지 35화

by Stardust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4박 5일을 보냈다. 헬싱키와 코펜하겐을 두고 막바지까지 다음 여정을 정하지 못하던 내게, 트롬쇠에 사는 선배가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코펜하겐을 꼽았다. 그 말에 솔깃했다.


북방 한계선의 도시 트롬쇠에서 살다 보면 모든 물자가 귀하다. 서울은 너무 멀고, 코펜하겐은 도시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대안이라고 했다.

커피도, 맛집도, 쇼핑도, 미술관도, 교통 인프라도…

"삶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어요."

코펜하겐이라고 발음하며 흐뭇해지는 선배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입헌군주국이다. 바이킹 시대에 통일된 나라가 천 년 넘게 이어졌다. 상인들의 항구란 뜻을 가진 코펜하겐(København). 천년왕국답게 도심 곳곳에 고풍스러운 왕궁이나 왕립 건물들이 펼쳐져 있고, 활기찬 상점들과 사람들이 넘쳐흘렀다.



30년 전만 해도 코펜하겐은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말 그대로 죽어가는 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 중심의 보행 도시를 만들고, 대담하고 창의적인 건축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역사적 유산과 현대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재생을 꾸준히 시도한 결과라고 한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천 년에 걸쳐 세워진 둥글고 뾰족한 지붕들 사이로 현대적 건축물이 어우러져,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독특한 스카이라인을 그려내고 있었다. 한때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뉴욕 하이라인과 유럽 여러 도시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눈여겨볼 대목이 많은 도시였다.



도착한 첫날 아침, 안개를 헤치고 구도심의 북카페를 찾아 커피를 마셨다. 과연 커피도 맛있다. 서울의 트렌디한 카페에서 마시는 것처럼 풍부하고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가 최고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익숙한 아메리카노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쌀쌀한 북유럽 늦가을 아침엔 큰 컵 가득 담겨 진한 향을 풍기는 뜨거운 커피가 제격이었다.



기분 좋게 카페인을 채운 나는 48시간 코펜하겐 패스를 샀다. 시간에 쫓겨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도시 패스를 끊은 것이 처음이었다.


코펜하겐은 크고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교통비가 꽤 비싸 패스가 유용했다. 무엇보다 나를 이 도시로 이끌었던 루이지애나 미술관까지 가는 기차표가 포함되어 있었다. 왕궁들, 미술관과 박물관, 운하 보트 투어, 그리고 밤늦게까지 여는 루이지애나 미술관과 글립토테크 미술관까지. 일정은 꽤 빡빡했다. 하지만 고가의 패스를 구입한 덕에 짧은 시간에도 많은 곳을 볼 수 있었다.



어느 도시를 가든 나는 미술관부터 찾는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미술관도 많다.

칼스버그 가문이 세운 Ny Carlsberg Glyptotek에는 수많은 조각과 그림들이 가득했다. 저녁 시간에도 붐비는 인상파 룸을 뒤로하고 다른 층으로 들어서자, 덴마크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만드는 고요한 세계가 펼쳐졌다. 북유럽 특유의 서늘하고도 따뜻한 수작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미술관에서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정원에서 칼스버그 맥주 한 잔을 마신 뒤 루프탑에 올라섰다. 천년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길 건너 티볼리 놀이공원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함성이 겹쳐지며, 코펜하겐의 밤이 깊어갔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기차로 40분쯤 달려 도착한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건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는 별칭을 가진 곳이다.


어스름한 저녁에 도착해 바닷가 정원의 풍경은 놓쳤다. 하지만 오가는 기차의 시간부터 미술관의 작품과 공간의 분위기까지,

그곳의 모든 순간이 좋았다.



특히 캐나다 작가, 존 라프만의 나인 아이즈(Nine Eyes)란 프로젝트가 인상 깊었다. 구글 스트리트 뷰는 전 세계를 기록한다. 존 라프만은 그 이미지 속에서 포착한 우연하고 이상한 순간들을 찾아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건 '너 세상 그리고 나'였다.


작가는 마추픽추와 아타카마 사막, 이집트 기자까지 세상을 함께 여행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문제는 그에게 그녀의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문득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탈리아 동부의 한 바닷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날, 구글 스트리트뷰 차량이 그들 앞을 지나갔던 순간. 그는 몇 주 동안 메달려 구글 스트리트뷰 속 호텔 주변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발견했다. 바람 부는 해변에 홀로 서 있는 그녀였다. 흐릿한 이미지였지만 아직 연인이었던 그날 두 사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다른 흔적도 찾아 나섰다. 함께 살던 밀라노 아파트, 손을 잡고 걷던 거리, 공원 벤치. 심지어 그녀가 프레스코화를 연구하던 터키의 작은 섬까지 뒤졌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그 바닷가 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스트리트뷰를 열었을 때 그 사진은 업데이트와 함께 사라져 있었다.


구글의 카메라는 세계를 끝없이 기록하지만, 우리가 붙잡고 싶은 것은 어쩌면 이런 찰나의 인연일지도 모른다.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는 이 상실이, 역설적으로 ‘지금’이라는 순간을 더 애틋하게 만든다.


https://youtu.be/PJT5jMwkvFo?si=aa9HO_TfZ3Uucxi_

너 세상 그리고 나


코펜하겐의 미술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The Hirschsprung Collection이었다.

외스트레 안레그 공원의 푸른 녹지 사이에 자리 잡은 단아한 건물은 마치 작은 예술 신전 같았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1830~1910년 덴마크 화가들이 바라본 해변 풍경을 조명하는 “해변에서의 하루”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뜻밖의 세렌디피티를 만났다.

덴마크 자연주의 화가 Peder Severin Krøyer였다.

그의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화가 Joaquín Sorolla의 바닷가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혹시 같은 인물은 아닐까 현장에서 검색해 볼 정도였다.


두 화가의 그림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 밝은 햇살, 물 위에 부서지는 빛,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림 위는 소로야, 아래는 크뢰위에르


크뢰위에르는 특히 여름 저녁의 ‘블루 아워’를 그리는 데 탁월했다. 그의 대표작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 화가의 아내와 개>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다시 돌아와 그 앞에 멈춰 섰다.



달빛이 번지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아내 마리와 반려견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다. 푸른빛과 보랏빛 사이, 블루 아워 속 하얀 드레스를 입은 마리의 눈빛은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화가는 스카겐 바다를 사랑했고, 아름답고 어린 신부 마리를 만나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다. 마리도 재능이 넘치던 화가였지만 유명 화가 남편 옆에서 점점 시들어갔다. 세월은 흘러, 아내는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고, 그의 삶도 함께 기울기 시작했다. 정신병에 한쪽 눈의 시력마저 사라진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고, 몇 해 뒤 생을 마감했다.


한때 스스로 빛나던 예술가였던 마리 역시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서로가 그려준 부부 초상화(스카겐 미슬관), 오른쪽은 신혼 시절 마리


그렇게 그의 푸른 시간도, 사랑도 저물었다. 남은 것은 바다와 그림뿐이었다.

아름답지만 쓸쓸했다.

북극 오로라의 초록빛이 우주의 색이라면, 크뢰위에르가 그린 푸른 밤은 인간의 고독이 스며든 색이었다.



사라진 스트리트 뷰 속 연인처럼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개 낀 아침의 커피 한 잔,

오래된 도시의 풍경과 이야기들,

그리고 스카겐 해변의 푸른 밤.


북유럽의 오래된 수도 코펜하겐에서 잊고 있던 나의 취향과 감각이 천천히 깨어났다. 어쩌면 나는 바로 그런 순간들을 만나기 위해 이 먼 여행을 떠나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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