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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리스 Aug 30. 2016

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1) 띠링, 경주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날이 화창한 어느 오후였다. 구름은 몽글몽글 피어있었고, 하늘은 새파랬다. 바람은 나뭇잎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런 좋은 날씨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토끼 하나는 오랜만에 외출을 감행했다. 싱싱한 풀을 잔뜩 먹고는 볼록해진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만족했다. 토끼 굴은 꽁꽁 숨겨져 있어 그 앞에선 하늘에서 날아온 녀석이 채 갈까 무서울 염려도 없었다. 등 따습고 배부르니 할 만한 건 잠을 청하는 일이렸다.

  “아흐음-”

 하품을 쩍 하고 기지개를 쭉 한번 피고 나선 오른 다리 왼다리 팡팡 차고 귀를 쫑긋쫑긋 한 다음에 털썩, 드러누웠더니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깜짝이야, 하고는 얼른 눈을 감고 죽은 척 가만히 있었다. 달아날 수 있으려나, 여차하면 주먹 한 번으로 시간을 벌어볼 셈이었다. 요런 저런 머리 굴리는 동안 앞에 있는 놈이 크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그림자가 다급한 소리에 멈칫했다. 그 틈을 타 토끼는 잽싸게 상대를 확인했다. 맥이 쭉 빠지면서 빳빳한 수염이 축 늘어졌다. 맹하고 눈두덩이 시커먼 너구리였다. 요놈 때문에 감히 이 토끼가 긴장했단 말이야? 괘씸했지만 겁먹었단 사실이 알려지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것이었다. 아휴, 쪼그마한 것들이 얼레리 꼴레리~ 하는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너구리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왜애?”

 토끼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능청스럽게 받았다.

  “내가 누구냐?”

  “앞집 사는 토 생원이지.”

  “생원이 무엇하는 건데?”

  “공부 많-이 한 거 아녀.”

  “그래 그러면 내가 공부한 게 좀 있는데 들어볼 테냐?”

  “그래, 그러지 뭐.”

  “조오기로 쭉 가면 바다가 있지? 파랗게 짠 물 많은 곳. 그걸 넘어가서 계속 가면 또 땅이 나온단 말이야.”

  “응, 그래서?”

  “아, 좀 들어봐라. 거기 땅은 인간들이 이 근처랑은 좀 다르게 생겼는데, 눈이 퉁방울 같고 코가 주먹만 하단다. 그 코 큰 인간들 중에서 공부 많-이 한 놈이 있었걸랑,”

  “토 생원처럼?”

  “그래 그렇지.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동네 인간들이 두 패로 갈려서 치고받고 싸웠는데”

  “코 생원이 있었는데 인간들이 싸웠다고?”

  “아 거 말 좀 끊지 마라. 인간들이 싸웠는데 코 생원은 안 싸웠어. 조용히 굴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그랬는데 한 패가 서너 명이 우루루루 몰려온 거야. 척, 하고 그 앞에 서서는 어느 편이냐, 하고 물었더니,”

  “물었더니?”

  “햇빛 가리지 말고 옆으로 비켜서라고 그랬단다.”

  “퉁방울 생원이?”

  “그래, 알겠냐?”

  “무얼 알아? 아, 비키라고?”

 별것도 아닌 것 아까 왜 그리 다급하게 부른 것인지, 공부란 게 쉬운 걸 복잡하게 빙빙 돌려 말하는 건지, 뭣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간에 너구리는 토 생원이 그렇게 급한 목소리였는지도 사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내가 멍청해서로니, 하고는 그냥 선뜻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었다. 멀뚱히 서 있는 너구리에게 토끼는, “왜 왔냐?” 하고 물었다. 어이쿠, 그래 이걸 잊으면 안 되었다. 너구리는 얼른 재 넘어 사는 거북이가, 빠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토선생의 높은 이름을 듣고서는 경기 한 판 하자 청했다더라 하고는 전했다. 사실이 그랬다. 토끼는 살겠다고 요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띄었고, 지금까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리기의 명수라는 명성이 자자하게 만들었다. 명성이라 함은 사실 큰 귀에 ‘겁도 많아’ ‘꼬랑지에 불붙은 듯’ 잘 도망간다는 소문이었고, 그리하여 토끼는 남들에게 자기를 36계라는 계책을 잘 쓰는 훌륭한 전략가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손자라는 위대한 병법가가 옛날에 있었는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책 마지막에 강조해 넣은 것이란다. 이러나저러나, 무엇이 중요할쏘냐. 거북이가 지금 그런 토끼의 자존심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말이다. 

  "거북이가?"

  "그래, 거북이가."

  "느릿느릿한 그 거북이가?"

  "그래, 그 거북이가."

  “하자 그래, 경기 한 판. 다음 달에 처음으로 달이 제일 밝은 날 다음날 까치들이 시끄럽게 울어재낄 때 요 앞에 너럭바위에서 보자 그래라.”

 토끼는 너구리가 이걸 외울 수 있을는지도 살짝 걱정이 되었으나, 알겠노라 하고 가 버린 녀석을 도로 붙들고 와 확인할 수 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도로 발라당 드러누워버렸다. 그러고는 개미가 귀와 귀 사이만큼의 거리도 채 가기 전에 도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수염 하나를 씰룩, 하고는 성에 안 찼는지 또 두 개를 씰룩, 했다. 옛날 옛적에도 조상님 하나가 경기를 했었던가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이겼던가, 졌던가. 토끼는 이리 귀 쫑긋 저리 귀 쫑긋 해도 잘 기억이 안 나고, 자기가 경기를 진다면 그건 높은 이름에 흠이 가는 일이고 해서, 어떻게, 그 거북이란 놈을 한 번 만나봐야 알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토끼는 폴짝폴짝 들어가 잠을 청했다.

  보름이 한 번 지나갈 정도의 남아있는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토끼가 그동안 한 것은 뛰기 빼고 전부였다. 아니, 오히려 전부보다 더 많은 것을 했다. 어느 날은 원숭이들이 앞으로 다가올 경기에 고심하며 걸어가는 토끼를 불렀다.

  "어이, 거기 토생원!"

  "왜 불러?"

 뭔가 좀 다툼이 있는 듯해 보여 눈에 띄지 않게 조심조심 가고 있었던 토끼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을 부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때 원숭이들이 훅 앞으로 날아왔다.

  "어, 이것 좀 나눠봐."

  "잘 좀 나눠봐."

 원숭이들이 내민 것은 고깃덩어리였다. 으힉, 깜짝이야. 한 번 놀란 토끼는 계속해서 깜짝깜짝 자꾸 놀라고 귀를 움찔움찔 거렸다.

  "왜, 알아서들 나누지 그러냐."

  "아니 이 놈이 나누면 지가 크게 가져갈 것이고, 내가 나누겠다고 하면 이 놈이 반대를 하니 그럴 수 도 없고, "

  "예전에 다른 놈한테 부탁을 해 봤더니 그놈은 야금야금 뜯어먹어 버렸지 뭐야."

 두 마리는 사이좋게 말을 받아가며 말했다.

  "토 생원은 풀만 먹으니 고기는 안 먹을 것 아냐."

  "그러니까 적당히 잘 나눠서 주라."

 고기는 손도 대기 싫단 말이다!라고 속으로만 외치던 토끼는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나누기는 좀 그렇다. 아, 끝까지 좀 들어봐, 원래는 너희의 부탁을 들어주고는 싶으나 사실 그것은 너네 둘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이니 알아서 해결하는 게 맞고, 나는 초식을 하니 고기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야. 왜냐하면, 옛날 옛날에 한 채식하는 현자가 살았는데, 그 사람이 잔치에 가서 양파만 골라먹었대. 왜 그러시냐, 하니 고기는 맛있으니까."

  신빙성도 없고 논리성도 없는 얘기였지만, 나머지는 듣지도 않고 고기가 맛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원숭이들은 공감한다는 듯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맛있는 고기에 손을 대면 먹고 싶을 것 아니야. 너네는 내가 먹어버려도 돼?" 

  "아니, 절대 안 돼!"

  "안돼!"

 동시에 합창하듯 말하고 서로의 어깨를 꼬집으며 몸을 배배 꼬는 원숭이들을 보며 토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내가 나누면 안 되겠지?"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던 원숭이들이 멈칫했다. 그 틈을 타 토끼는 준비해 두었던 답변을 내었다.

  "그러니까 너, 네가 나누고 지금 꼬집히는 너, 그래 네가 나누라고, "

 하나는 희희낙락해서 고기를 들고 잽싸게 나누려 들고, 하나는 으르렁 거리며 제지했다. 토끼는 자기를 노려보는 눈빛에 주저앉을 뻔했으나 꿋꿋이 다리에 힘을 주었다.

  "가만히 좀 있어! 지금 나 눈 치켜뜨고 쳐다보는 너, 네가 골라."

 갑자기 전세가 뒤바뀌었다. 아까 눈에서 뜨거운 광선을 쏘던 쪽은 신이 나서 빨리 대충 나누라고 요구하고, 나눠야 하는 쪽은 조금의 차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매우 천천히 세심하게 눈이 가운데로 모아질 정도로 집중해서 자르려고 했다. 고기 나누는 데에 정신이 팔린 원숭이들은 토끼가 잽싸게 길을 바꿔 뛰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언제는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혼자 뛰면 슬슬하게 되니, 어떻게 위험해질까를 고심했다. 토끼의 기술은 사실 목숨이 걸린 상황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간다는 것에 있었으니까 말이다.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솔개가 잘 다니는 길목에서 알짱거리는 것뿐인 듯싶었다. 그런데 솔개는 이미 떠도는 이야기들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맘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을 테니 재미 좀 보자고 약속이나 한 듯이 아무리 팔다리를 쭉쭉 뻗어 대자로 누워있어도 군침만 삼킬 뿐, 눈에 난 실핏줄이 도드라지고 다리 힘줄이 흔들리는 녀석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쫓는 척이라도 해 주지, 애꿎은 솔개를 원망하며 토끼는 여우를 다음 상대로 찍었다. 끈질기긴 했지만 조금 만만한 감이 없잖았다.

  “여우야,”

 바로 도망갈 채비를 하고, 토끼는 조심스럽게 여우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상태가 좀 이상했다. 동공에 힘이 풀리고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바닥을 긁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포도......”

  “응, 뭐라고?”

  “포도......”

 토끼는 자기 귀를 너무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워 남들은 못 듣노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방금 여우가 포도라고 한 것 맞지? 긴장이 조금 풀렸으나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능적으로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접근하는 것을 노렸을 수 도 있었다. 그때, 여우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쉬었다. 

  “토끼야,” 

 비장하게 토끼를 부르고 흠칫, 놀라 수염을 빳빳이 세운 녀석의 반응을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토끼야, 포도는 시겠지?”

 반쯤 비어버린 눈과 공허와 고뇌로 가득한 미간은 마치 토끼가 푸릇푸릇한 클로버가 잔뜩 나 있는 언덕을 사냥개에 쫓겨 그냥 지나쳤어야만 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하필 얼마 뒤 장마철이어서 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더랬다. 에라이, 모르겠다. 토끼는 옆에 철퍼덕 주저앉아버렸다.

  “왜, 포도 먹고 싶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번뜩이며 조언을 구해오는 여우를 차마 버릴 수가 없는 토끼는 원숭이들을 불렀다. 저번에 고기를 잘 나눴다고 감사 인사를 하더니 필요한 일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자청한 놈들이었다. 뭐, 둘이 재미 한 번 붙으면 온 동네가 아수라장 난장판이 되긴 하지만, 이런 일에는 쓸모 있을 것이었다. 원숭이들에게, 토끼는 요러쿵 저러쿵하는데 이 녀석이 포도 농장을 알려줄 테니 포도 두어 송이 던져주고 남는 것들은 너희가 먹어라, 고 했다. 공짜 포도가 생긴다는데 누가 거절할쏘냐. 얘기가 잘 끝나자, 토끼는 원숭이들을 농장으로 데리고 가라 했더니 좋다고 잽싸게 튀어나간 여우가 밉기보다는 불쌍했다. 쯧쯧,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을꼬. 그러고는 포도가 아니었다면 자기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보다는 무모가 철철 넘치는 행동을 반성했다.

  “아악, 이럴 때가 아니지. 내가 더 급한데!”

 다시 거북이와의 경주가 떠오른 토끼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러고는 걱정을 차 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뒷다리로 땅을 팡팡 차며 온 산을 돌아다녔다. 이렇게라도 움직여 놓는 게 굴 속에 앉아 날만 세고 있는 것 보다야 나았다. 그러다 풍뎅이들 싸움에 눈이 멀어 구경하다가, 감히 조상님 꼬리털로 만든 붓에 걸고,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재밌는 삶일 것이라는 위험하고도 엄청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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