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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인류학자 Mar 04. 2020

아기띠의 미학

둘째 해강이를 낳아 기르면서 아이 셋을 갖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해강이는 첫째랑 다르게 잠투정이 심한 아이였다. 게다가 두 아이의 욕구를 혼자서 돌보는 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임을 깨달았다. 모두가 피곤해지는 저녁시간이 되면 고역의 정점에 다다른다. 저녁식사를 준비해서 큰 아이 저녁을 먹니다. 이 일은 단순하지 않다. 밥에 흥미가 없는 아이를 달래고 협박도 해 가며 약 한 시간에 걸쳐 숟가락을 들고 쫓아다녀야 한다. 입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밥을 보고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얼른 씹도록 재촉하기 위해 볼을 누르거나 턱 밑을 두드리는 효과 없는 손짓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다음 입에 넣을 숟가락을 들고 있다가 아이의 손놀림에 밥이 떨어진다. 그 숟가락에 애써 만든 적은 양의 고기반찬이 올려있기라도 하면 쿨하게 휴지로 닦아지지 않는다. "에이~C" 하며 고기반찬은 다시 주어 숟가락에 올린다. 아이 밥 먹이기는 정말 감정노동이 심한 작업이다. 그리고 나면 내 체력과 식욕은 바닥이 난다. 저녁을 건너뛰거나 대충 먹어치운다. 둘째 아이를 씻기고 재울 준비를 한다. 첫째 아이가 둘째 재우는 중간에 나를 찾지 않도록 한 30분 정도를 맡아줄 놀잇감을 찾아준다. 나와 아이의 컨디션이 안 좋다면 애초에 TV를 틀어준다. 미디어를 보여주지 않으려 애를 쓰는 나지만, TV는 나의 독박 육아에 유일한 조력자이다. 둘째가 겨우 잠에 들 즈음 아니면 막 들었는데 큰 아이가 나를 찾아 둘째가 깨는 날이면, 내 마음은 이 때다 하고 온갖 짜증과 분노를 밀어내는 듯하다. 이 감정은 내가 내는 것인가 내가 당하는 것인가?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 아니 그동안 가슴 깊은 곳에 남겨져 있던 묶은 짜증들이 올라와 5살 아이처럼 다스려지지 않은 채로 감정이 분출된다. 그 감정이 큰 아이에게 큰 소리와 매서운 눈빛으로, 둘째 아이를 다독이는 거친 손길로 드러날 때에는 나로부터 분출된 감정들이 다시 자괴감으로 다시 내 가슴 어딘가에 자리한다.

이렇게 괴로웠던 저녁시간에서 나를 구해준 것이 바로 뒤로엎기다. 저녁을 먹고 재울 준비가 끝나면 둘째를 등에 엎는다. 엎고 나면 허리를 구부리기가 힘드니까 그전에 바닥에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거나 식탁 위에 대략 올려놓는다. 아이를 등에 엎고 집안 정리와 설거지를 시작한다. 흐트러진 장난감과 식탁 위를 정리한 뒤, 싱크대에 서서 물을 켜고 설거지를 한다. 등에 업힌 해강이는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논다. 큰 아이는 언제는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나도 그때그때 그 요구를 들어준다. 설거지를 마칠 때 즈음이면 둘째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있다. 잠든 둘째 아이를 방에 눕히면 어느새 방과 주방은 정리가 끝나 있고 나와 첫째 아이 둘만의 시간이 된다. 고맙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첫째를 씻겨주고 책도 읽어주고 마사지도 해주며 첫째도 나도 치유의 시간을 보낸다.

등에 엎는 이 행위가 주는 의미가 크다. 아이를 아기띠로 앞에 안아 재워보기도 했다. 그때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게 되니 이제나 제제나 언제 잠이 드나 주시하게 되고 예상한 시각에 잠이 들지 않으면 발을 동동 구르며 토닥이던 손길이 거세지기도 한다. 그런데 뒤로 엎으면 몸과 마음이 여유가 생긴다. 일단 엎은 채로 웬만한 집안일이 가능하다. 어떤 일을 해도 둘째는 업혀있으니 보채지 않는다. 둘째가 잠투정으로 울음과 짜증을 부려도 눈에 바로 보이지 않으니 여유를 가지고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다. 설거지 소리가 백색소음이 되고, 나도 설거지하는 행위에 집중하니 아이가 보채도 몸을 흔들며 "오야~오야~ 우리 해강이가 졸려요~ 어서 자자 자장자장~" 장단을 맞춰주는 정도만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는 쉽게 견뎌 낼 수 있다.

배 앞에서 등 뒤로 아이를 옮기는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지다니 참으로 놀랍다. 기껏해야 30센티 정도의 거리두기와 시선 돌리기가 우리를 이렇게 편하고 여유 있게 해 준 것이다. 뒤로 엎기의 미학이다.

목표를 이루는 데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등에 엎기" 기술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너무 먼 거리두기는 위험하다. 별거를 하면 이혼으로 가게 된다.ㅎㅎ 그리고 거리만 두어서는 안 된다. 배 앞에서 등 뒤로 가는 순간 내 시선이 언제나 잠이 드냐에서 설거지로 갔고, 잠들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었던 것처럼, 시선을 다른 데 두어야 한다.

언젠가 해온이 해강이도 자라고 자라서 십 대, 이십 대가 되고 학업문제, 친구 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 앞에서 나는 다시 또 애가 탈 때가 있겠지. 그때도 이 뒤로 엎기 기술을 발휘해야겠다. 아이와 나 사이의 건강한 거리를 만들고, 나의 시선을 아이에게만 두지 않고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는 잘 자라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 시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가고 있고 그 시선을 쫓아 움직이고 있다. 오늘도 책을 보고 글을 쓴다.


2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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