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과 임찬규

2019년 9월 16일, KT 위즈 vs 엘지 트윈스

by 정주원

학창 시절, '수학'은 항상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과목이었다. 모의 고사는 말할 것도 없고, 나름 한 공부(?) 했기에 그래도 대부분 90점, 95점대를 유지하던 내신 중간 기말고사에서 유일하게 80점대만 맞아도 '선방'했다고 말하던 한 과목은 '수학'이었다. 똑같은 문제에 인물이나 상황, 숫자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전혀 풀이에 실마리를 찾지 못할 정도로 응용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같은 소금물 농도 문제이고, 속도 문제인데 철수와 영희로 배운 문제를 철수와 철희 형제일 때는 못 푸는 안타까운 현실. 그렇게 난 사악한 수학 선생님들이 '변별력'이라는 미명 하에 깔아놓은 함정과 매력적인 오답들을 단 한번도 가뿐히 통과해본 적이 없었다.


난 올해 임찬규를 보고 있으면 자꾸 그 시절 내 수학 시험지가 생각난다. 모두가 분발했지만, 특히 올해 엘지 트윈스의 투수진은 가히 '잔칫집'과도 같았다. 페넌트레이스를 치르며 어느 정도의 부침은 있었지만 윌슨-켈리-차우찬으로 이어지는(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길게 보면 이우찬, 배재준까지) 나름 준수해진 선발 투수 로테이션. 그리고 불펜에서는 정우영과 고우석이라는 오랜만에 엘지 마운드에 나타난 실력 있는 영건들을 중심으로 진해수, 문광은, 김대현 그리고 트레이드되어 온 송은범까지. 아 참, 비선출의 놀라운 반란을 보여준 한선태 선수까지. 엘레발이라 불러도 할 말은 없지만, 올해 엘지의 마운드는 마치 과거 김성근 감독의 '벌떼' 마운드를 보는 듯한 감개무량함을 팬들에게 선사했다. (물론 손실도 있었다. 엘지의 우승에 인대를 바치...지는 못했지만 부자가 모두 엘지 트윈스에서 활약한다는 새로운 목표에 남은 인대를 바치기로 경로를 선회한 '롸켓' 이동현과 다시 한번 '역습'을 보여주나 했지만 전혀 예상도 못한 이유로 '밑'으로 추락하며 불명예 은퇴해 버린 이름도 거론하기 싫은 '그 사람'이 그렇다.) 임찬규는 95, 90점을 상회하는 시험지들 사이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내 비오는 수학 시험지 같았다. 지난 해 그래도 11승을 기록하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듯 억세게 운이 좋았지만) 나름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매년 '올해는 다를 것이다.'라는 설레발도 내 수학 성적과 닮아있긴 하다.


올해 직관으로 처음 임찬규를 본 건, 지난 6월 16일에 있었던 엘지-두산전이었다. 그 날 임찬규는 '그 사람'이 휴식을 위해 2군으로 내려가며 임시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임찬규는 같은 성을 가진 임지섭과 함께 KBO 한 이닝 최다 볼넷 8개와 타이를 이루는 진기록을 팬들에게 선사했다. 그 날도 꼭 이겨줄 거란 마음으로 잠실벌을 찾은 나는 득점할 때마다 하늘을 수놓는 두산 응원단의 폭죽 세례와 신이 나서 애타게 해를 찾는 두산 팬들, 그리고 경기가 끝나갈 즈음 1루 전체를 수놓는 핸드폰 후레쉬 쇼를 감상하다 돌아와야만 했다.


비난을 하자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점점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힘이 세지는 것 같다. 물론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임찬규는 나름 쏠쏠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기억하는 임찬규는 이번 시즌 선발로 나와 5이닝을 무사히 넘기는 걸 언제 봤나 싶을 정도로 팬들의 억장을 무너뜨린 그 모습 뿐이다. 그랬던 임찬규가 그제 9월 16일, 수원에서 벌어진 KT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와 5이닝 1실점의 준수한 피칭을 선보였다. 올해 kt에 정말 강했던 임찬규는 4월에 kt와의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진 못했지만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는 좋은 피칭을 했고, 결국 그제 경기에서 6개월만에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엘지는 날이 선선해질수록 더 강해진 전력을 과시하며 그제 경기 승리로 포스트 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기분 좋은 와중에 굳이 역적을 뽑자면 공을 빠뜨리는 실책을 범한 정주현 정도랄까..?)


누가 뭐래도 임찬규는 엘지에 꼭 필요한 선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인 시절의 혹사로 자신의 강점이었던 속구를 잃었지만 지금까지 꿋꿋이 엘지의 마운드를 지키고 있고, '멘탈 스포츠'라 불리우는 야구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멘탈'을 보여주는 선수다. 개인적으로 출중한 야구 실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팀에 대한 '로열티'가 있는 선수가 임찬규다.

고3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대입을 준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누누이 말씀하신 것도 '멘탈'과 '꿋꿋함'이었다. 일찍이 수학을 포기했다는 '수포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던 그 때, 그래도 난 꿋꿋이 수학을 잡고 놓지 않았다. 수학을 포기하고 다른걸 더 공부해봐야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난 논술로 대학을 갔기에 수학이 크게 당락을 좌우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수학을 놓았다면, 난 다음 해에도 재수 학원을 전전하고 있지 않았을까. 수학을 놓았다면 만약 논술 전형에서 떨어지고 내게 '수능'이라는 선택지만이 남았을 때, 그야말로 '멘붕' 상태에 빠졌을 테니 말이다. 응용은 젬병이지만 적어도 기본 개념은 숙지하고 있었기에 어떤 상황이 와도 대처할 수 있다고 '멘탈'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난 생각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라는 선택은 사람을 더 좋은 결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갑자기 자기자랑(?)을 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아 좀 민망하다.)


엘지에게 '임찬규'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지금 당장 마운드에서는 걱정(을 넘어선 분노)을 일으키는 선수라 할지라도, 단장님에게까지 까불까불댈 수 있는 그만의 '유쾌함'과 웃음을 잃지 않는 건강한 '멘탈'이 매력적인 선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는 못했지만 '멘탈'을 다잡을 수 있도록 날 간접적으로 도와줬던 '수학'이라는 과목처럼, 임찬규 특유의 그 '멘탈'과 '꿋꿋함'이 팀 어디에선가 엘지가 '우승'이라는 큰 목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보탬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말은 이래놓고 임찬규가 마운드에 올라와 또 볼질을 시작하면 난 욕을 해대겠지. 하지만 애정이 있으니 욕도 하는거다. 임찬규는 내 '수학'처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