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두 개의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시장에서 여권이고 지갑이고 다 잃어버렸어요. XX'
'여권 재발급받으려면 마드리드에 있는 영사관까지 가야 한다는데 막막합니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네이버 카페 '유랑'에서 바르셀로나를 검색했을 때 나온 글들의 대부분이 이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바르셀로나로 넘어가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 본 바르셀로나는 소매치기의 천국, 범죄의 온상 따위의 말로 설명이 가능한 곳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참 겁이 많고 상상력이 뛰어난지라, 벌써 상상 속의 나는 여권이고 지갑이고 다 털리고 람블라 거리 한복판에서 울고 있었다. '겁'과 '상상력'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처음으로 한국 땅이 아닌 외국을, 그것도 혼자 여행 중인 나로서는 마치 자이로드롭 대기줄에 서 있는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실 바르셀로나는 나의 첫 유럽 여행에서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던 도시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팀이 FC 바르셀로나이기도 하고,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를 감명 깊게 읽었으며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손예진처럼), 시에스타를 즐기는 스페인의 낙천적이고 유쾌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 여행객에게는 '고담'과 같은 곳이라니. 신나서 7박 8일이나 일정을 잡아놨는데... 선량한 여행자들의 지갑을 훔치고 즐거운 여행을 망치려 하는 카탈루냐 사람들이 너무 짜증이 나고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아직 스페인 땅은 밟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기대 반 걱정 반 아니, 걱정 100%의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이윽고 비행기는 바르셀로나의 엘 프라도 공항에 도착했다.
'야 유랑 보니까 바르셀로나 겁나 무섭네...사람들 여권 털리고 날리도 아닌데...'
친구들과 쓰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걱정 섞인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직 아무도 답이 없다.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왠지 더 무서웠다.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꿀꺽 한 번 삼키고 캐리어를 더 꽉 쥐었다. 그 누구에게 말도 걸지 않고 'Aerobus'라고 쓰인 표지판에만 의지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카탈루냐 광장에 내렸다. 유럽 여행자들의 공식 내비게이션인 구글 맵스에 의지해 걸음을 재촉한 지 10분 만에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나를 향해 'Ola'를 외치는 게스트 하우스 직원을 보니 총알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아군 진지를 발견한 듯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이곳에 오기까지의 약 30분 정도가 한 나절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주변의 풍경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냥 안전한 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었다.
배정받은 방에 들어와 침대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문득 한 가지가 고민에 사로잡혔다. 스페인에서 교환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는 친구가 내일 이 곳에 도착해 함께 여행하기로 했기에 내일부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이 문제였다. 이 곳에 도착한 지금의 시간이 오후 한 시. 아직도 한 나절이 남아있는데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범죄의 온상인 저 도시를 혼자 마주하자니 겁이 나고, 그렇다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내자니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 놈의 '겁'이 문제였다. 이 놈이 '상상력'과 함께 내 머리 속에서 메시와 수아레즈를 연상케 하는 콤비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니 나로서는 아주 그냥 죽을 맛이었다. 좀 혼자 돌아다녀보고 싶은데 이 두 놈이 나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에 내가 내린 결정을 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로 여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머리 속의 '겁'과 '상상력'에 정면으로 맞서 보기로 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겐 한낱 한심한 겁쟁이로 비칠지 몰라도, 내게는 처음으로 겁에 순응하지 않기로 맞서기로 한 인생 최고의 도전이었다.
용기를 내서 다시 한번 바르셀로나와 마주하기로 했다. 털려봐야 여권, 지갑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처럼 어두운 골목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스물여섯의 짧았던 생을 마감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 따위는 '넣어두기로' 했다. 다만 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 두려움을 해소하려 게스트 하우스 직원에게 물었다.
"여기 소매치기가 진짜 많다던데...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나요?"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내게 말했다.
"아직도 여기 있었어요? 당신보다 작은 여자들도 밤늦게 혼자 잘만 돌아다녀요."
그 직원의 말에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창피하게도 사실 그 말에 더 용기를 얻었다. 문을 박차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 없이 몸만 나오니 그래도 마음이 더 가벼워졌다.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이 이제야 내게도 조금씩 내리쬐고 있었다. 하늘이 보이니 사람들의 표정도 보이고, 가로수도 보이고, 아름다운 건물들도 보였다. 다니면 다닐수록 두려움은 사라지고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혼자서 람블라 거리를 걸었고 포트 벨까지 가서 콜럼버스의 동상도 보았다. 걸으면서 본 것은 내가 상상했던과 완전히 달랐다. 사람들은 활짝 웃으며 스페인을 즐기고 있었다. 거리의 상인들은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마 이 날 하루를 그냥 혼자 방에서 보냈으면 평생 후회했을 것이다. 하루를 낭비한 것 때문이 아니라, 내 겁을 이기지 못한 내 모습이 창피해서 말이다.
바르셀로나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고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와이파이를 켜니 단체 카톡방에 친구들에게 새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떴다.
"야 괜찮아. 생각을 해봐 여행하다가 털린 놈들만 거기다가 글 쓰는 거야. 재밌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유랑에 글 쓸 새가 어디 있냐. 돌아다니기 바쁜데. 네가 어느 정도 주의만 잘 하고 다니면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다녀."
사실 여행을 하다 보면 나처럼 (나만큼은 분명 아닐 것이다)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껴져 겁이 나는 순간들이 더 많을 것이다. 물론 겁내고 주의하고 조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주의와 조심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내가 100% 옳다고 믿고 살았던 것이기도 하다. 겁은 대체로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겁은 나 스스로의 길을 가로막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겁을 이겨내고 나아간 카탈루냐 광장의 따뜻한 햇살은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감싸 안아 녹여주었다.
어줍지 않은 여행 선배라고 여행을 떠나고자 계획하시는 분들께 한 가지만 말씀드리련다. 여행 중 과도한 '겁'과 '상상력'은 넣어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