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양면성
퇴근 시간의 화곡역. 끄적끄적 글을 한 편 쓰려고 카페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앉으면 반대편에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돌아가는 길목 중 하나인 이 곳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는 인파로 붐빈다. 그리고 각자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여기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따금씩 인간의 일생에 대해 생각한다. 출근으로 시작해 퇴근으로 끝나는 게 비단 이 하루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그런 것 같달까. 버스정류장에 선 사람들의 면면에는 그저 무표정한 피곤함만이 있을 뿐이다. 흔히 하는 표현으로 '돈 버는 기계'가 된 것 같다. 진짜 기계라면 차라리 지치지라도 않지.
언젠가 한 번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유가 가능하고,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특권이라기보다, 오히려 저주일 수도 있다고. 인생의 의미 이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순히 생물학적 본능으로 하루 먹고 하루 살다가 죽는 동물이 오히려 인간보다 나은 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도깨비 공유의 불멸의 삶이 상이자 벌인 것처럼 말이다.
그냥 인간이 '돈 버는 본능'을 가진 동물이라면. 돈 열심히 벌고 잘 먹고 잘 살다 죽는 본능을 평생 행하다 적절한 때에 죽으면 되는 동물이었다면. 내 삶의 의미가 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뭐고 그런 거 없이 무슨 일이던 돈 열심히 벌고 살다가 죽으면 되는 동물이라면.
말을 못 하여서 자기표현을 못하고, 평생 밥이나 먹고 일만 하다가 죽는 동물들을 우리는 짠하고 불쌍히 여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편협한 시각이다. 길을 거닐다 강아지나 길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에휴 죄를 짓고 인간의 탈을 쓰고 태어나서 생각하는 벌을 받아 평생을 고민과 고생 속에 살겠구나.'
저주스럽게도 인간은 '사유의 본능'을 지니고 태어났다. 본능적으로 내 삶의 의미를 탐하고 나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인간의 탈을 쓰고 태어난 우리의 본능이다. 이 사유의 능력이 저주인 이유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평생을 그것에 대해 고민해도 죽을 때까지 답이 안 나온다는 거다. 그래서 저주스럽게도 우리의 삶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후회와 회한이다. 나 같은 28살의 풋내기가 감히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평생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번 사람도, 자식을 훌륭히 키워낸 부모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다 해본 사람도 (그런 사람도 없겠지만), 내가 아는 한에선 죽는 순간엔 후회와 회한을 머릿속에 담는다.
28년 간 몇 차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내 마음속에 조금씩 두려움이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끝나는 순간 개운함 없이 후회를 남기게 하는 인생이라는 이 불공평한 게임 때문에, 막연하게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이 두려워졌다. 그러니까 '사유의 저주'라는 이상한 공상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일 테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약 3~400년 전 데카르트는 나는, 즉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왜 이리도 세상은 모순덩어리일까. 세상만사가 좋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좋다. 생각하는 힘이 나를 존재하게도 하지만, 그 존재의 이유가 삶 전체를 고뇌로 물들인다. 이제 28년밖에 안 살았는데 벌써 이리도 삶이 무겁고 힘들면, 진짜 죽기 직전엔 아마 평생 해온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죽게 될 거다.
그래서 인생의 선배님들이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라고 하나보다. 어차피 좋다가도 나쁘고, 양면적인 삶 부정적이게 생각하다 죽느니 좋게 좋게 생각하며 살다가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최후를 맞는 게 더 낫더라는 뜻 아닐까. 그래도 전생에 무슨 그리도 큰 죄를 지었기에 '사유하는' 인간으로 태어났을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