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기에

영화 <문라이트>

by 정주원

영화 <문라이트>는 계속해서 내게 넌 누구냐고 질문을 던진다. 쉽게 답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난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도 우리는 같았던 적이 없다. 내가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그렇기에 세상이 그렇다. 이 영화는 흑인 '샤이론'의 인생이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의 인생을 세 챕터로 나누어 소년기, 청소년기, 성인기의 그를 통해 이 요지경을 바라본다. 한 인간의 삶 속의 세 부분은 마치 세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다르다. 그 차이는 각 챕터의 제목인 그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이 세 개란 말인가. 그것이 이상한가?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이름은 하나였던 적이 없다. 내 겉모습이나 성격에 따라 서 그에 맞는 이름을 새로 받는다. 우린 그것을 별명이라고 부른다. 동창회에 가면 내 이름보다 그 당시 불렸던 내 별명을 들을 때가 더 많다. 듣기 좋은 것도 있지만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나쁜 별명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 이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담고있는 그 시절 전체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별명'은 인생의 한 부분을 오롯이 담고 있는 상자다.


샤이론은 아버지도 없이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 밑에서 자라 사랑받지 못했다. 집에서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왜소한 그를 친구들은 '리틀'이라고 부른다. 어린 샤이론의 이름은 샤이론이 아닌 리틀이다. 그의 이름은 그의 소년기 전체를 관통한다.


삶은 탄생으로 시작된다. 철학적으로 삶은 관계 맺음으로 시작한다. 그 첫 걸음은 부모와의 관계일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삶의 방식을 배우며 세상 살이에 나설 준비를 한다. 그런데 소년 '샤이론'은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부모 역할을 해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어머니에게 마약을 파는 약장수 '후안'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피해 어느 낯선 방에 들어온 리틀. 어두운 그 곳은 아직까지 사랑받아보지 못한 어린 리틀이 보고 있는 세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곳은 후안의 약 창고다. 자신의 약 창고에 숨어 있는 리틀을 본 후안은, 일단 리틀에게 밥부터 먹인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마음을 굳게 닫은 후안은, 후안과 그의 여자친구 테레사가 베푸는 호의에 조금씩 마음을 연다. 테레사, 이름부터 매우 자애롭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는 '식탁'에서 사랑과 함께 규칙을 가르친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리틀은 아직 그를 정의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그를 미국에서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말인 'Faggot'이라고 부르고, 그의 엄마조차 아들의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 리틀은 후안에게 호모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리틀을 그렇게 정의해 버렸지만, 엄밀히 리틀은 게이가 아니었다. 아직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 그에게 성별은 주어진 것이 아닌, 그가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리틀의 질문에 후안은 아직 그런 걸 알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치며 후안이 모래사장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더 마음을 울린다. '달빛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푸르다.' 아직 리틀은 다름을 알고, 차별을 받을 나이가 아니었다. 아직 우리가 같은 인간임을 배우고 사랑받아야 할 어린 소년이었던 것이다. 리틀에게 후안은 아버지였다. 이 영화의 끝까지 '후안'은 샤이론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그를 따라다닌다. 청소년기의 샤이론에게 테레사는 후안이 하는 짓을 꼭 빼닮았다고 하고, 어른이 된 샤이론의 모습은 후안 그 자체다.


그 도화지에 색을 칠하는 이는 한 명 더 있다. 바로 그의 친구 '케빈'이다. 친구들 앞에서 당하기만 하는 리틀을 답답하게 여긴 케빈. 스스로 약하지 않다고 말하는 리틀에게 케빈은 약하지 않은 걸 보여주라고 말한다. 그렇게 한바탕 힘겨루기를 하며 리틀과 케빈은 친구가 된다.


청소년기 그의 이름은 '샤이론'이다. 왜 별명이 아닌 샤이론일까. 청소년기는 사춘기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사춘기는 그 어떤 말로도 나를 정의할 수 없는 시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내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샤이론'이라는 존재 자체를. 그렇기에 두번째 챕터의 제목은 '샤이론'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학교에서 이미 '게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샤이론은 터렐과 그 친구들의 괴롭힘을 받는다. 학교마다 꼭 하나씩은 있는 못된 녀석들이 깡마르고 유약해보이는 샤이론을 가만히 둘 리 없다. 터렐은 성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샤이론을 모욕한다. 그에게 아버지와 같았던 후안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는 마약에 완전히 미쳐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들의 돈을 빼앗는다. 물론 자애로운 '마더' 테레사가 한참 감정적으로 예민할 샤이론을 감싸안는다. 그래도 앞으로의 자신의 모습을 결정할 중요한 시기에 후안이 없는 세상은 어두운 정글일 뿐이다. 샤이론은 자신을 괴롭히고, '게이'라고 자기를 이상하게만 바라보는 친구들과 친해지지 못하고 외톨이가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지점 중 하나는 타인들이 그를 일컫는 '동성애자'와 'Faggot'이라는 말과 샤이론과의 일치 여부다. 영화 내내 샤이론은 한번도 스스로의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제대로 말한 적이 없다. 하나뿐인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비관하는 엄마와, 샤이론을 경멸하는 터렐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 뿐이다. 샤이론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의 강물에 의해 표류하고 있다. 여리기만 한 샤이론은 종이배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후안이 그에게 수영을 가르쳤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글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샤이론이 살아남기 위해. 종이배에 모터를 달아주기 위해.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기의 샤이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은 케빈이다. 학교에서 혼자인 샤이론의 곁에 케빈은 친구로 남아있다. 샤이론처럼 사춘기를 겪으며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케빈은 여느 때의 청소년들처럼 여자를 꼬시고, 애인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케빈을 바라보는 샤이론의 눈빛은 묘하다. 그저 친구라고 하기엔 둘 사이엔 가슴이 선덕선덕한 무언가가 있다. 친구와 애인 사이의 감정 사이에서 묘한 줄타기를 하던 둘은, 달빛의 바다 아래에서 사랑을 나눈다. 둘은 같은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둘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조금 달랐다. 케빈은 그 나이 대 아이들이 누구나 가지는 호기심으로 샤이론에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샤이론은 케빈에게 감정적으로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케빈의 품에 폭 기대어 입을 맞추는 샤이론의 모습은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은 그의 마음이 솔직하게 묻어난다.

그렇기에 케빈과 샤이론의 잠깐의 사랑은 파국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터렐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걸려버린 케빈과 샤이론. 케빈은 샤이론에게 주먹을 날려야 할 상황에 놓인다. 누구보다 샤이론을 잘 알기에, 처음엔 주저하던 케빈은 결국 그에게 주먹을 날린다. 케빈은 한참 친구들이 중요할 청소년 시기에 스스로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샤이론도 그런 케빈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해 보였을까. 막다른 코너에 몰려버린 샤이론의 선택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샤이론은 의자로 터렐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고는 경찰에 연행된다. 얼음물에 얼굴을 담그며 온순하고 따뜻했던 그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버렸다.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된 샤이론의 이름은 '블랙'. 마이애미를 떠나 소년원 생활 이후 애틀란타에서 생활하게 된 블랙의 모습은 '후안'과 똑같이 닮아있다. 여리여리했던 그의 몸은 예전의 '후안'처럼 근육질로 변했고, 마약을 팔며 생활한다. 이빨에 그릴즈를 끼고 말투, 자세 모두 소심하기만 했던 예전과는 달라져 있다. 후안의 차에 놓여있던 왕관 모양의 장식품은 블랙의 차에도 똑같이 올려져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시 태어나고자 한 블랙은 사실 새롭지 않았다. 그의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자신을 위협하며 바뀌어가는 세상에서 '후안'은 잡고 싶은 지푸라기였을 것이다.

그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 또한 달라져 있다. 마약 중독자 보호 시설에 들어가 있는 어머니의 태도부터가 다르다. 마약을 팔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자신 때문임을 자책한다. 삐뚤었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누구보다 사랑을 필요로 할 때 사랑받지 못한 샤이론에게 미안해 한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시간은 지나버렸고, 많은 것은 변해버렸고 이제와서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샤이론의 엄마가 뿜는 담배 연기에서는 그 회한이 깊게 느껴진다.

그리고 몇 년만에 걸려온 케빈의 전화. 요리사가 된 케빈은 샤이론에게 자신의 식당에 놀러 오라며, 이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한다. 이 영화에서는 밥은 만남을 상징한다. 후안을 처음 만났을 때도, 사랑했던 케빈과 오랜만에 재회할 때도 그들이 하는 것은 밥을 먹는 일이다. '먹고 살자'라는 말처럼, 먹는 행위만큼 우리의 인생을 원초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마약상이 된 샤이론의 모습에 놀라워하는 건 케빈도 마찬가지다. 마약상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케빈의 말에 샤이론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샤이론을 계속해서 바뀌게 만든 건 세상이다. 어찌 할 도리가 없던 샤이론을 코너로 몰아넣은 것은 세상이었다. 이제와서 세상은 착한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다시 케빈을 만난 샤이론은 예전의 마냥 순하기만 했던 그로 돌아가 있다. 샤이론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케빈과의 사랑을. 달빛 아래서 나누었던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것을 바꿔놓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샤이론과 케빈은 서로를 다시 안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샤이론을 계속해서 바뀌게 만든 건 세상이다. 그를 둘러 싼 주변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해서 변한다. 계속해서 샤이론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고, 그렇게 그는 매 시간, 매 순간 다른 사람이었다. <문라이트>를 단순한 블랙 무비, 퀴어 무비라고 생각한다면 그 차이에만 집중한 나머지 내린 결론일 것이다. 분명 우리는 세상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아마 변하지 않는 '나'의 본질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누구냐고 묻는 이 영화에 대한 답이 되어줄 수 있다. 영화 내내 많은 것이 변해도, 샤이론의 후안에 대한 동경과 케빈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동성애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또 같다. 그렇기에 휘황찬란한 저 달빛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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