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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n 27. 2018

X 같게도 빛나는 우리 청춘

영화 <변산>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결국 영화 <변산>은, 이준익 감독의 청춘 트릴로지는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윤동주와 박열이 살았던 그때의 모습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없었지만 그들은 오롯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어나갔으며, 훗날 우리에게 빛나는 청춘의 한 표상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 인생도 다르지 않다고. 팍팍한 일상 속에서 찌질해 보이기만 하는 네 모습이 결국 언젠가 네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 되어 있을 거라고 영화 <변산>과 이준익 감독님의 청춘 3부작은 그렇게 우리의 청춘을 어줍잖게 미화하지도 않으며, 가볍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처럼 별 거 아닌듯 보여도 그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는 응원을 던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변산>은 삶의 양면성을 가장 잘 다루는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 철학이 가장 잘 녹아있는 영화이고, 청춘 3부작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영화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찾은 영화 <변산>의 시사회. 영화 포스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동주>, <박열>에 이은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


 흑백의 화면 속에서 잃어버린 나라의 백성으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윤동주와 그의 시구들, 자신을 대역죄로 기소하라며 기꺼이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이 되고자 했던 박열의 그 호탕한 웃음과 기개. 그 거대한 트릴로지의 마지막을 장식할 이야기가 고작 찌질하고 우울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네 청춘을 담은 영화라니. 조금은 헛웃음이 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기대가 생겼다. 한반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장 맛깔나게 만들어내는 이야기꾼인 이준익 감독님이 과연 지금을 사는 우리 청춘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셨을까.


 이준익 감독님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며, 내가 이 분의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준익 감독 특유의 문법으로 풀어내는 '양면적'인 우리 인생의 모습이다.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는 절대 그저 마냥 웃기거나, 마냥 슬픈 법이 없다.

 영화 속 대화들은 마치 어제와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충분히 들었을 법한 것들이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픈 아버지의 똥기저귀를 갈며 하루에 똥을 세 번 만 싸면 되지, 뭔 놈의 똥을 여섯 번이나 싸냐는 딸의 타박과 똥을 내가 싸고 싶어 싸냐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버지의 항변. 겪은 사람이라면 너무도 공감할 이런 일들. 이런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들 속에서 그 문장들과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뉘앙스를 듣고 있자면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한바탕 정신없이 웃다 보면 어느새 웃음이 있던 자리를 슬픔이 차지하고 있기도 하고, 감동이 차지하고 있는 식이다. 두 가지 다른 사건으로 웃음과 슬픔을 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웃음과 슬픔 모두를 품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재미있어도 내일은 슬플 수 있고, 오늘은 슬퍼도 내일은 그 일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사다. 그래서 한없이 애매하고 답답하고 뭣 같기 만한 우리의 인생을 지극히 한국 사람의 방식으로, 한국 사람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그것이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 <변산>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흑역사'다. 이 말이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이제는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도 이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흑역사 :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혹은 없던 일로 된 과거의 일을 가리킴.


 그렇다.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과거의 일. 그게 바로 흑역사다. 래퍼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자신의 고향인 변산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학수'(박정민)는 모든 래퍼들의 꿈, '쇼미 더 머니'를 6년 개근했지만 매번 2차, 3차에서 탈락한다. 래퍼가 되려는 과정에서 '학수'는 자신의 고향을 지워버리기 위해 노력한다. 온통 부끄러운 역사들로 얼룩진 그곳에서의 기억 모두를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연히 아버지의 뇌졸중 소식을 듣게 된 학수. 보기도 싫은 아버지지만 결국 억지로 찾은 변산에서 학수는 자신이 그렇게도 잊고 싶어 하던 '흑역사'들과 마주해야 하는 위기에 봉착한다.


 영화 <변산>의 주인공인 래퍼 심뻑, 학수는 자신의 '흑역사'를 그저 외면하기로 했다. 잊어버리려고 했다. 현재에 서있는 내게 과거의 흑역사를 정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잊는' 것일 테니까. 랩에 사투리가 섞여 나온다며 고향을 묻는 쇼미 더 머니 심사위원의 말을 잘라먹고 '서울이요'라고 말하며, 렛츠기릿을 외치는 학수의 모습은 그의 그런 마음가짐이 잘 드러난다.


와~ 고향이라고 해준 건 X도 없으면서 증말, 발목은 X 나게 붙잡네


 그렇게도 잊고 싶던, 세탁하고 싶던 고향인데. 학수의 말마따나 마치 '향우회'를 하는 것마냥 학수의 앞에 자신의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버스 안에서 장미꽃을 내밀었던 학수의 첫사랑 경미(신현빈)부터, 한 때는 꼬붕이었지만 이제는 어엿한 '건달'이 되어버린 용대(고준)까지. 그중에서도 학수의 흑역사의 정점이자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은 가엾은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자식도 내팽개친 채 제멋대로 산 '아버지'다. 그런 기억들을 피하려고만 하는 학수에게 고향 친구 '선미'(김고은)은 이런 말을 던진다.


언제까지 평생을 피해 다닐 것이여?
니는 정면을 안 봐.


  아마도 학수가 쇼미 더 머니를 6번이나 나갈 정도로 실력을 갖춘 래퍼이면서도, 2차와 3차에서 번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흑역사'를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국 랩은 자신의 이야기를 16마디 안에 표현해 내는 것이다. 학수가 잊어버리려고 발버둥 쳤던 그 '흑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뱉어내는 가사의 원천이었다. 그러면서도 학수는 그것을 부정하려고 했다. 내 얘기임에도 그걸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가사는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일 뿐이다. 아무리 쌈빡한 비트에 절대 가사를 절지 않는 완벽한 전달력으로 심사위원과 관객들의 귀 속에 랩을 때려 박아도, 그 안에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으면 2% 부족한 음악이 되는 것일 테다.



 그렇다고 무작정 모든 걸 잊고 새로 시작하려고 상경한 서울에서의 학수의 모습은 어떤가. 아직도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지난 시즌 쇼미 더 머니에는 통편집을 당해버렸다. 주변 래퍼들은 언젠가부터 자신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합격 메달이 아니라 개근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결국 우리 인생은 '흑역사'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는가. 가까이에서 보면 '전성기'였던 것이 멀리서 보면 '흑역사'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영원히 행복한 기억일 줄만 알았던 연애의 모든 순간들이, 헤어지는 순간 온몸을 오그라들게 하며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가 되는 것처럼. 결국 원하는 꿈을 이뤄낸 사람이 자신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지긋지긋하게 고생스러운 과거를 힘들지만 아름다웠던 시절로 떠올리는 것처럼.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자신의 과거는 절대로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다. 학수가 잊고 싶은 그 과거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잊히지 않고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결국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학수의 구수한 사투리에, 그런 학수의 랩 가사 속에서 그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은 쓰레기 같은 그 과거가 언젠가는 빛나는 보석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지금은 '흑역사'일지 몰라도 언젠가는 빛이 나게 되는 것이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장면들이고, 추억이다. 결국 마지막에 자기 인생을 희극으로 끝내고 싶다면 학수는 자신의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했다. 그것이 자기가 하는 음악의 원동력임을, 결국 불우하고 창피하기만 한 그 흑역사가 있어야 더 훌륭한 래퍼가 될 수 있음을 학수는 깨달아야 했다.


 영화 <변산>을 보고 나서, 나도 모르게 난 이런 상상을 해봤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으아아아아악 오그라들어!!! 진짜 미쳤네. 내가 그냥 미쳤네. 이걸 내가 썼다고? - 윤동주


아 진짜 틀지마 틀지 말라고...(결국 틀었다.) 아니 내가 지금 뭘 입고 있대... 쟤는 왜 법정에서 왜 사모관대는 입고 쇼를 하고 있는 거야...!! 아 빨리 좀 끄라고! - 박열


 만약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윤동주와 박열이 지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청춘들이라면, 언젠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우울했던 시절 시로써 자신과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진 순수한 참회의 마음도, 세상을 갈아엎어보겠다고 일본의 법정에 섰던 그 순수한 패기도, 결국 이 땅에서 살아간 어느 한 시대 청춘들이 보여준 삶의 단면이다. 후세의 우리들은 그것을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하지만 윤동주에게도, 박열에게도 그것은 치기 어린 젊은 시절의 '흑역사'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하지만 먼 훗날 죽음 앞에서, 그 후손들에게서 그 '흑역사'는 '빛나는 흑역사'가 되어 있었다.


 결국 영화 <변산>은, 이준익 감독의 청춘 트릴로지는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윤동주와 박열이 살았던 그때의 모습도 그 당시에는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없었지만 그들은 오롯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썼고 행동으로 옮겼고 훗날 우리에게 빛나는 청춘의 한 표상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네 인생도 다르지 않다고. 팍팍한 일상 속에서 찌질해 보이기만 하는 네 모습이 결국 언젠가 네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 되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청춘 3부작은 이 시대의 청춘에게서 윤동주와 박열의 모습을 발견해냈고, 윤동주와 박열의 청춘을 우리에게 녹여낸 것이다. 그렇게 영화 <변산>은 우리의 청춘을 어줍잖게 미화하지도 않으며, 가볍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처럼 별 거 아닌 듯 보여도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변산>은 삶의 양면성을 가장 잘 다루는 이준익 감독님의 영화 철학이 가장 잘 녹아있는 영화이고, 청춘 3부작을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영화였다.


 영화 <변산>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친한 동네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맥주를 한잔 먹는 것 같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편의점에서 사간 맥주 4캔 중 3캔을 마셔버렸기 때문에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옛날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어떠한가. 소주 반 병에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나면, 남은 3~4병은 서로가 과거에 행했던 흑역사로 얼룩지는 것이 옛 친구와의 술자리 아닌가. 박정민과 김고은, 그리고 다른 배우들의 마치 내 얘기를 보는 것처럼 편안한 생활 연기는 관객들을 웃게도 하고, 마지막엔 울게도 했다. 물론, 영화가 아닌 '삶' 자체를 보여주며 보는 이를 울고 웃기는 이준익 감독님의 연출력도. 아 참, 영화 내내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배우 박정민의 스웩 넘치는 랩도 이 영화를 맛깔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


 극 중에서 학수가 쓴 이 시처럼, 가난하고 볼품없는 그의 고향 '변산'은 어쩌면 학수 자신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도 보여줄 '노을'은 있다. 물론 다른 지역의 노을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노을은 그 가난한 폐항, 그 곳에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내 흑역사 위에서 빛나는 노을이라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 있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노을'인 것이다. 하루의 끝자락에 찬란히 빛나는 노을처럼, 언젠가 내 인생을 찬란히 빛내줄 나의 흑역사. 나의 인생.

 

 X 같다는 말이 하루에도 열 번씩 튀어나오는 요즈음의 하루지만, 그냥 꾸역꾸역 열심히 살아보련다. 먼 훗날 내 인생의 노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야... 참 X 같게도 빛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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