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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Jul 19. 2018

그저 행복하길 바랄 뿐

영화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가 제공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아마 이 영화에서 시바타 가족의 모습을 보며 보는 사람에 따라 그들이 행복해 보였을 수도 있고, 왜 저러고 사나 답답해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항상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중립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크나큰 정신적 노력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 쪽과 저 쪽 모두를 이해하는 것, 사실 그것을 우리는 '관용'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그렇게 매 순간 중립을 지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예리한 칼날'에는, 따뜻함이 숨겨져 있다.
이 영화의 원제인 <만비키 가족>은,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포스터에 적힌 이 영화의 카피처럼, 이들이 훔친 것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앞에서부터 '사회적 안전망'이라 표현해 온 복지 당국의 결정은 이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는 것이었다. 복지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행복한 삶(福祉)이라는 뜻이다. 그 말뜻 그대로 원래 복지 당국이 설립된, 그들이 일하는 목적대로라면 이로 인해 시바타 가족은 더 행복해져야 했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복지 당국은 오히려 이 가족의 행복을 방해하는 훼방꾼이었다. 그 누구도 허락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행복, 그들은 훔쳐서라도 행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1.

 어느 가족이 있다. 시바타 가족의 가장 '오사무'는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부인 '노부요'는 세탁 업체의 공장에서 일하지만, 고정적이지 않은 이 가족의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늙은 노모 '하츠에'가 매달 수령하는 노후 연금이다. 하츠에 가 혼자 사는 것으로 되어 있는 서너 평 남짓의 작은 집에는, 부부의 자녀 둘까지 6명이 살고 있었다.

 이 가족의 아들인 '쇼타'는 학교에 가지도 않으며, 때때로 아버지와 2인조를 이뤄 동네 가게에서 생필품을 훔쳐 생활에 보태고 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이들이 키우던 딸 '린'은 옆집 부부가 잃어버린 어린 딸 '유리'였다. 그리고 이 가족은 계속 하츠에의 연금을 타 먹기 위해 죽은 하츠에의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게 시신을 집 바닥에 유기하기까지 했다.

 


2.

 어느 평범한 저녁, 가족들과 TV 뉴스를 통해 전해진 이 소식을 접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저녁상 앞에서 뉴스를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을 테다. 좀도둑에 유괴범, 게다가 시체 유기까지. 저 할머니를 가족들이 죽였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조차 없어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화목한 가정'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TV 속의 저 가족. 그들이 지금 소개할 일본 영화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시바타 가족의 한 단면이다.


3.

 뉴스로 들었다면 막장 인생들이 모였다며 혀를 끌끌 찼을 법한, 이 '비정상적인' 가족들을 영화 <어느 가족>을 통해 바라본다. 영화로 본 그들의 모습은 신기하게도, 매우 행복하다.

 그런데 도무지 그 이유를 쉽게 떠올릴 수가 없다. 전혀 행복할 이유가 없는 그들은 왜 행복할까. 아니, 그들은 왜 행복해 보일까. 그렇게 이 가족이 행복한 이유를 찾아 나서다 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보이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지 않는다.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과, 그 길이 놓여 있는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고정관념'이라는 틀 속에 갇혀 영화를 보고, 이 가족을 바라본다.

 일반적인 우리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면 이 가족은 하나의 '사회악'과도 같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가게에서 물건을 도둑질하고 늙은 노인의 연금에 기대어 근근이 살아간다. 사회적 안전망의 붕괴로 인해 생겨난 '기형 가족'이라고나 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마치 '예리한 칼날'같다. 어느 편도 아닌 정확히 중간 지점에 서서 무서우리만치 절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한 가족의 모습을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감독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다면, 영화는 그 순간부터 그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되어 버리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며 관객들이 최대한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관객들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듯이.


과연 그럴까?

 

 그렇게 바라본 이 '기형 가족'의 모습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어줍잖은 고정관념과, 도덕관념을 깨부순다.


 리뷰에서 영화 내용을 얘기하는 것을 정말 꺼려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님의 영화이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부득이하게 영화의 몇 장면을 스포일러 하려고 한다. 온전히 극에 몰입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알고 보면 볼수록 더 감탄하게 되는 것이 이 분의 영화라고 생각하기에 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부터는 영화 내용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4.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맺어지는 것이 '혈연'이기에, 혈연은 우리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을 결속하는 가장 중요한 끈으로 존중받는다. 그리고 그 끈으로 이어진 것'만'을 우리는 '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혈연'이라는 말 안에 '행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가족이 데려다 키우는 옆집 딸아이 '유리'는 사실 유괴한 것이 아니었다. 도둑질 한 탕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오사무와 쇼타는 추운 겨울 외투도 입지 않고 밖에 나와 앉아 있는 유리를 발견한다. 불쌍해 보여 일단 집으로 데려왔고, 이후 다시 데려다 놓으려 했지만 그들은 유리 부모의 부부싸움을 목격했고, 유리의 몸 군데군데에 나 있는 폭력의 상처들을 보게 된 것. 그래서 '유리'는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유리'의 실종 사건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겁을 먹은 시바타 가족은 유리를 다시 살던 집에 보내려고 하지만, 유리는 가지 않는다. 원래 살던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유리는 사랑한다면 때리는 게 아니라 그저 꼬옥 안아주는 거라던 노부요(안도 사쿠라), 밀개떡을 챙겨 입 안에 넣어주는 인자한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방긋 웃으며 머리를 빗어주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언제나 옆에서 웃어주는 유쾌한 오사무(릴리 프랭키), 그리고 곁에서 항상 자길 챙겨주는 오빠 쇼타(죠 카이리) 곁에서 함께 살고 싶었다.

 혈연은 다른 곳에 있었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를 위해주고 북돋우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사람들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무뚝뚝하게 툭툭 내뱉는다. 아내 노부요는 공사장에서 발을 다쳐 돌아온 오사무를 보며, 산재를 받으려면 다리가 아예 으스러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하츠에는 다른 식구들을 '내 연금이나 축내는 놈들'이라고 말하고, 오사무는 하츠에를 '불량 할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가족은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며, 사랑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진심을 전하지 않는 데서 전해지는 진심을 단지 하나의 컷만으로 관객의 마음 깊은 곳까지 그 느낌을 전달했다.



 모두가 함께 바다로 여행을 간 시바타 가족. 다섯 식구들이 백사장에서 파도를 발 끝에 적시며 단란하게 노는 모습을 하츠에 할머니는 지긋이 바라본다. 그리고 죽음을 예감한 듯, 혼자서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한다.


(다들... 고마웠어...)


 소름이 돋았다. 적절한 자막으로 저 장면이 주는 감동을 오롯이 그릇에 담은 강민하 번역가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저 한 마디가, 다섯 식구를 자신의 소중한 노후 연금으로 먹여 살린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솔직히 우리는 가족들에게 매일 사랑해, 고마워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툴툴대고, 남에게도 하지 않을 상처가 되는 말을 가족들에게 하며 살기도 한다. 살다 보면 가족이기에, 너무도 가깝기에 진심을 전하기 힘들 때가 많지 않은가. 하츠에 할머니의 이 한 마디 대사는, 그 복잡다단한 감정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었다.


*여기서부터는 영화 흐름에 중요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5.

 결국 후에 시바타 가족은 유괴와 시체 훼손 등의 혐의로 경찰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된다. 여기서 조사관과 노부요가 조사 과정에서 나누는 말들은 '가족'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낳는다고 다 부모랍니까?

낳지 않는다면 부모가 될 수 없지요.


 두 사람의 말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낳지 않는다면 부모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낳아 놓고 기르는 데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부모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 중,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가족이 '기형 가족'인 진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할머니인 하츠에는 노부요에게 엄마일 테지만, 노부요는 하츠에를 '할머니' 혹은 '할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쇼타는 오사무와 노부요를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실 오사무와 노부요도 법적으로 부부관계가 아니다. 그들에게 '가족' 구성원 간의 명칭은 큰 의미가 없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 이들 모두는 말 그대로 남남이다.


 이들은 진짜 혈연인 '가족'에게서 큰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린은 부모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불쌍한 아이였고,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노부요, 하츠에는 전 남편에게 버림을 받아 자식조차 없는 노인이었다. 상처는 혈연보다 더 강력한 끈이 되어 이 가족을 단단히 결속하고 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글의 서두에서 나는 이 가족을 어떻게 표현했던가. '비정상'적인 가족이라느니, '기형' 가족, '가짜' 가족. 나 스스로도 얼마나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고정관념이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어쩌면 다른 것을 전부 배제한 채 혈연이라는 하나의 끈에만 의존하는 나의, 우리의 가족에 대한 인식이 너무 편협해 보인다.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들도 결국엔 돈으로 얽혀 있는 관계가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 할머니의 연금이 없었다면 이들이 함께 살 이유도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들을 행복한 게 한 건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이들이 함께 사는 목적이 '돈'이었다면, 돈을 더 많이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면 그저 동네 마트에서 생필품이나 도둑질 하는 게 아니라 더 큰 곳을 털려고 했을 것이다. 돈은 수단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저 함께 살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아니, 행복하기 위한 돈'만' 필요했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이 영화의 원제인 <만비키 가족>은,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포스터에 적힌 이 영화의 카피처럼, 이들이 훔친 것은 함께 한 시간이었다. 앞에서부터 '사회적 안전망'이라 표현해 온 복지 당국의 결정은 이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는 것이었다. 복지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행복한 삶(福祉)이라는 뜻이다. 그 말뜻 그대로 원래 복지 당국이 설립된, 그들이 일하는 목적대로라면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을 통해 시바타 가족은 더 행복해져야 했다. 하지만 보는 이에게 복지 당국은 해결사가 아니라 오히려 이 가족의 행복을 방해하는 훼방꾼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허락해주지 않는 그들만의 행복, 그들은 훔쳐서라도 행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5.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과거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룸>에 출연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사회는 관용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더욱 약한 사람들에게 창을 겨누고 있어요.


 이 인터뷰를 보니,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이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판단하는가. 판단하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거고, 저것은 저거다.'라고 판단해 버리면,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어느 한쪽 편에 선다면 다른 쪽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게 우리의 머리 속에서 고정관념이 되고, 편견이 된다.


 아마 이 영화에서 시바타 가족의 모습을 보며 보는 사람에 따라 그들이 행복해 보였을 수도 있고, 왜 저러고 사나 답답해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항상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중립에 선다는 것은 그만큼 크나큰 정신적 노력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 쪽과 저 쪽 모두를 이해하는 것, 사실 그것을 우리는 '관용'이라고 부르는 것일 테다. 그렇게 매 순간 중립을 지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예리한 칼날'에는, 따뜻함이 숨겨져 있다.


 일본 내에서도 이 영화 때문에 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영화가 도둑질을 옹호하고 있다느니, 일본 사회의 아픈 면을 끄집어내서 망신을 주고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에게는 일단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말하길 권하고 싶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았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보고 이 영화가 도둑질을 옹호하고, 세금으로 만든 영화로 일본에 먹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히로카즈 감독의 판단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 속에서 불러일으킨 당신의 생각인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관용'일 것이다. 저 사람의 행복, 내 행복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마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은 비극은 우리 앞에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결국 한 가지 단면으로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도둑질을 한다는 게 용인될 수 있는 것이냐, 아무리 폭력을 당하는 아이여도 부모에게 말도 없이 그렇게 기를 수 있는 것이냐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사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배워온 나로 써도, 무엇이 옳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관용'일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여느 때처럼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려던 쇼타와 린을 불러 세운 주인 할아버지가 내민 손에는, 회초리나 삿대질을 하는 손이 아닌 쮸쮸바 2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나긋이 동생에겐 이런 일 시키지 말라는 한마디 말만 남긴 채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남에게 피해가 된다면 물론 안되지만, 관용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가끔 우리에게 세상은, 살기에 너무나 척박하고 고통스러워서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 내게만 이렇게 고될까, 내게만 이렇게 박할까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영화 <어느 가족>이 보여주는 이런 가족이 생겨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결국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행복을 바라며 살아간다. 물론 그 행복에 답은 없다.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마치 벤다이어그램의 교집합처럼 두 집합이 맞닿는 부분에서는 싸움과 갈등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관용'은 그 교집합을 포근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윤활유'가 되어 줄 수 있지는 않을까. 어느 누군가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라, 서로가 조금씩 이해하려 한다면 어느 순간 '관용'은 어렵지만은 않은, 쉬운 일이 되어 있지 않을까. 너무 유토피아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그런 세상이 오기를 조심스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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