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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기승전결'은 하늘나라로

영화 <인랑>

by 정주원

시사회를 찾기 전 영화 <인랑>의 정보를 검색해보고 많은 기대를 했다. 남북의 통일을 전후로 정국의 혼란과, 이를 바탕으로 펼쳐지게 될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게 될 영화. 마무리는 아쉬웠지만 지금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분단의 현실을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풀어냈던 영화, <강철비>를 떠올렸다. <강철비>가 남북 사이에서 벌어지는 군사, 외교적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인랑>은 통일이 대한민국 내부에 불러올 수 있는 내적 갈등을 다룬 영화일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는 곧 큰 실망으로 변했다. 컨셉은 그저 '무더운 이 여름, 관객들의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줄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뭐 그런 거였던 걸까.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고생하고 노력하는 배우들과 제작진들의 노력을 충분히 모르는 바 아니기에, 난 영화를 보며 비난을 최대한 자제하고 싶어 하는 편이다. 그런데, 실망이 너무 크기에 이 글은 아쉬운 소리를 성토하는 장이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후 일본 원작 만화 <인랑>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원작을 보니 그저 '이게 뭐야'라고만 생각했던 영화 <인랑>의 아쉬움이 하나 둘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1. 빈약한 스토리


영화 <인랑>은 통일을 합의한 남북과, 이를 견제하려는 강대국들의 경제 제재로 민생이 극도로 악화된 2029년의 대한민국이 배경이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통일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고, 일부는 스스로 지하세계로 스며들어 게릴라가 되었다. 그리고 통일을 반대하는 반정부 테러단체 '섹트'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 테러 단체를 막고자 통일준비 정부가 만든 것이 '특수기동대', 일명 '특기대'이다. 영화의 주인공 임중경(강동원)은 이 '특기대'의 핵심 멤버로 등장한다. 하지만 점차 '특기대'의 과잉 진압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고, 이를 호시탐탐 지켜보던 정보기관 '공안부'는 이 기회에 특기대를 해체하고 향후 통일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한다. 이것이 영화 <인랑>이 다루는 이야기의 골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대체 '남북통일'을 왜 소재로 사용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애초 영화 <인랑>의 예고를 보며 내가 기대했던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한 두 세력인 통일에 반대하는 '섹트'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정부를 비롯한 권력 기관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입장의 차이였다.

향후 미래를 내다볼 때 한반도의 통일은 동북아시아에서 우리 민족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 통일을 찬성하는 권력기관의 입장이고, 지금 당장 민생이 파탄 나고 하루 살기도 힘든데 일방적으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일을 반대하는 민중의 입장일 터다. 이것이 영화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더 극에 효과적으로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영화 <인랑>에서는 특기대를 해체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공안부'와 이에 대항하는 '특기대' 사이의 갈등만 부각한 나머지, '섹트'는 영화의 첫머리에 광화문 시위 장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권력 기관 사이의 암투를 다루려고 했다면 굳이 '남북통일'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야 했을까. 강대국의 경제 제재로 인해 민생은 어떤 식으로 힘들어졌는지, 힘든 민중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전혀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시위 현장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화염병만 던지면 그게 그냥 악화된 민심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고 권력 기관 사이의 암투가 제대로 다뤄졌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특기대의 과잉 진압을 표면적인 이유로 하여 이를 해체하고자 하는 공안부의 목적만 있을 뿐,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남북통일이 점차 가시화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섹트'에 대해 이들을 상대하는 특기대와 공안부의 접근 방식, 혹은 그에 대한 의견 차이에 따른 두 권력 기관 간의 갈등을 더 첨예한 방식으로 대립하게 했더라면 더 박진감 넘치지 않았을까. 그저 아무 이유도 없이 공안부장 이기석(허준호)과 그의 오른팔 한상우(김무열)는 임중경을 미끼로 덫을 만들어 특기대를 해체시키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냥 그 이야기뿐이다. 한 마디로, 남북통일이 아니라 어떤 프레임을 씌웠어도 상관없는,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졌다. 도대체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은 어떤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가. '섹트'와 '특기대', '공안부'등 기본적인 스토리는 영화 <인랑>과 같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인랑>은 '대체역사물'로써 전후 급격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민중들이 과격한 사회운동을 벌이는 196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작에서도 역시 '섹트'는 그렇게 큰 역할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온건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회가 점차 정상화되고, 그에 따라 '특기대'의 존재 이유조차 희미해지는 상황에서 각 권력 기관들이 살아남고자 하는 첨예한 입장 대립과 야합, 첩보전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차라리 원작 만화는 각 기관들이 왜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는지, 행동을 하는 이유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는 스토리를 전개함에 있어 각 세력의 입장을 뚜렷이 드러내는 기본적인 개연성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영화는 의미 없는 화려한 액션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시대적 배경도 매우 아쉽다. 영화 <인랑>은 미술과 의상 등 여러 가지에서 원작 애니메이션을 거의 똑같이 묘사했다. 몇몇 장면들은 원작 애니메이션과 아예 똑같다. 원작을 카피했다고 욕하려는 게 아니다. 1960년대스러운 그림을 그대로 가져와서 2049년의 대한민국이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광화문 시위만 봐도 그렇다. 2049년이면 아무리 가깝다 해도 2~30년 후의 미래인데, 미래의 디스토피아 치고 시위 양상은 70, 80년대 민주화 시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무거운 기갑 특수복을 입은 특기대의 모습도 미래를 그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볼 때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특수복을 입은 강동원은 마치 '로보캅'같았다. 2049년인데, 2차 대전의 독일군 철모를 그대로 카피한 헬멧에 기갑 갑옷을 입고 기관총을 들고 굼뜨게 움직이는 '특기대'의 모습은 하다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2. 기승전'사랑'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주요한 스토리 중 하나는 동화 '빨간 두건' 이야기다. 빨간 두건을 쓴 소녀가 할머니 댁을 찾아가며 숲을 헤쳐가다 늑대를 만나고, 결국 늑대의 계략에 빠진 소녀와 할머니가 모두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비극적인 동화다. 우리는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갈라 소녀와 할머니를 구출해내고 배 안에 돌을 잔뜩 집어넣는 해피 엔딩으로 알고 있지만.

그리고 이 영화의 두 남녀 주인공인 임중경(강동원)과 이윤희(한효주)는 각각 이 동화의 '늑대'와 '빨간 두건을 쓴 소녀'를 은유한다. '인랑', 즉 번역하면 '늑대 인간'이 되는 냉혹한 특기대 대원 임중경과 섹트로 활동하다가 특기대에 의해 죽음을 당한 빨간 모자 소녀의 언니인 이윤희는,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리고 이윤희도 영화에서 내내 빨간 코트를 입고 다니며 동화 속 소녀를 은유한다.


가장 먼저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의 러브 라인은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원작에서도 영화 속의 임중경, 이윤희와 같은 '후세'와 '케이'의 러브 라인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한 프레임 중 하나다. 작전 중 자폭한 소녀와 이 소녀를 제지하지 못해 팀원들에게까지 큰 피해를 입힌 후세, 그리고 그 소녀를 꼭 닮은 언니 케이의 등장. 둘은 그렇게 만나게 되고 서로에게 점점 이끌린다. 원작 애니메이션은 두 사람이 단계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죽음 앞에 놓이는 위기의 상황을 겪고, 점차 사랑이 되어간다. 정말 소녀와 늑대가 함께하는 모습처럼 둘을 그려내면서 그 동화적인 분위기에 아련함이 더해진다. 인간이고 싶지만, 결국 '늑대'이자 '짐승'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만 하는 '후세'의 고뇌, 그리고 '인간'이지만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이용당해야만 하는 '케이'의 모습. 그리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케이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며 늑대로서 본인의 사명을 다하는 후세의 모습이 동화 '빨간 두건'과 절묘하게 섞여 들어가며 잔혹 동화로서 극의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영화 <인랑>도 원작과 비슷하다. 이윤희가 섹트 소탕 작전 중 섹트의 폭발물을 운반하다가 특기대에 포위되어 자폭한 소녀의 언니였고, 그로 인해 임중경과 이윤희가 이어져서 점차 사랑으로 연결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원작이 가지고 있던 동화적인 사랑의 아련함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임중경의 스탠스가 좀처럼 명확하지 않다. 도대체가 좋아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의중이 정확히 드러나지도 않는데, 거기에다 대고 이윤희는 자신과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자고 하는 식이다. 그런 점이 오히려 이윤희를 그저 의존적이기만 한 캐릭터로밖에 보이지 않게 한다.

임중경은 사실 과거 '과천 사태'라는 사건에서 죄 없는 여고생 15명을 사살하면서 마음속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이로 인해 인간적인 마음과 한 마리의 짐승처럼 감정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의 사랑에는 전혀 '기승전결'이 없다. 영화에서 둘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처음 만난 날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강하게 이끌리고 둘은 키스를 한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가 속해있는, 이용당하고 있는 집단에 의한, 필요에 의한 접근이었다는 사실은 맞다. 그것이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하지만 둘은 분명 사랑에 빠졌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둘은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테다. 그렇게 두루뭉술 진행된 러브라인이기에 솔직히 어떤 점이 두 사람을 사랑에 빠뜨렸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사람에 대한 연민인지, 아니면 그저 죽은 소녀의 누나라는 사실에 대한 연민인 건지 불명확하다. 임중경과 이윤희는 그렇게 아무 개연성도 없이 결말에 가서는 서로에 대해 갑자기 애절해지고 간절해진다. 그리고 결국 후세가 결국 케이를 죽이게 되는 원작의 결말과는 달리.... 스포는 하지 않겠지만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영화 <인랑>은 그런 스토리의 부실함을 소위 '있어 보이는' 영상미로 메꾸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겉만 번지르르한 모래성에 불과하다.


3. 볼 것 없는, 그냥 액션 영화.



영화 <인랑>에서 그래도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은 딱 하나, 액션이다. 잘 생긴 강동원이 나와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공안부 요원들을 해치우고 사건을 헤쳐나간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액션 영화라도 액션 하나로만 승부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아무리 잘생긴 배우가 멋지게 적들과 싸워도, 싸우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부실한 스토리는 빛나는 액션씬조차 빛이 바래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액션 자체도 너무 옛날 느낌이 난다. 마치 '터미네이터'나 '영웅본색'처럼 총알이 빗발치는 곳을 강동원이 총알 한 발 맞지 않고 헤쳐 다닌다. 영화를 보다 보면 사실 해체해야 할 것은 특기대가 아니라 공안부다. 2~30명을 데리고 특기대 요원 하나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요원인가. 김무열을 비롯한 무능한 공안부 요원들부터 다 사표 내야 한다.


영화 <인랑>은 강동원의 팬이거나, 잘생긴 배우들의 합이 잘 짜여진 액션 씬을 즐기고 싶은 분들이라면 추천한다. 하지만 남북통일과 같은 현실적인 소재에 대한 깊은 성찰이 보이는 스토리를 즐기고 싶었던 분이라면 절대 그런 기대는 하지 말고 들어가시길 추천하고 싶다. 결국 영화 <인랑>은 얼마나 대한민국 블록버스터 영화가 안이한 생각에 빠져있는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마블'의 영화만 봐도 그렇다. 팬들이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저 화려한 액션 때문만이 아니다. 마블의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국적인 유쾌한 감성, 자신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시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 작은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표현력. 그것이 사람들이 마블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아닐까. 하지만 영화 <인랑>은 세련된 영상과 액션만 있을 뿐, 스토리는 진부하고 엉성하며 뻔한 클리셰로만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이 영화가 조금은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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