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세계 위로 내려앉은 햇살

열쩡의 일상 기록

by 열쩡

머리에서부터 시작된 ‘외로움’이라는 병증이 발가락 끝까지 번져, 나를 삶의 길 한복판에 세워두었다.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삼복더위에도 몸이 떨리고, 누군가 손을 얹기만 해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날들이었다.


'본디 사람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혼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말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늘 누군가 곁에 있었고, 웃음이 먼저였고, 외로움은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으므로.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 시절 내가 미처 쓰지 않고 남겨 둔 감정들이 빚쟁이처럼 나를 한꺼번에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오래 쌓아둔 숙제처럼, 감당하기 버거운 무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때의 내 유일한 진통제는 빗소리였다. 떨어지는 빗소리가 경쟁이라도 하듯 공간을 가득 채우면, 손으로 직접 가슴을 때리지 않아도 마음의 응어리가 저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지만 서로 관심사가 달라 이름조차 모르고 지내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되며 단짝이 된 친구였다.

성인이 된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술기운이 얼큰해질 무렵, 나는 아빠의 부재로 인한 힘듦을 얘기했고 친구는 아빠의 존재로 인한 힘듦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같지만 같지 않고,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고민으로 아파했다.

헤어지기 직전, 좀처럼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시크함 그 자체인 친구가 조용히 나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 축축했던 내 세계 위로 밝은 햇살이 내려앉은 듯 따뜻했다. 그런 행동과는 거리가 먼 친구라는 걸 알기에, 그 따뜻함이 더 깊게 와닿았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를 만나면 그 시절의 우리가 떠오른다. 그날의 따뜻함이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서, 식지 않은 체온처럼 미약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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