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만 오는 마음

열쩡의 인생극장

by 열쩡

겨울만 오는 마음


20대 이전의 나는 단내, 꼬순내, 짠 내가 진동하는 주말드라마를 보며, '내 인생의 마지막도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어린 나이에 가지고 있던 사전에는 불가능이나 실패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단어들을 스스로 사전에 새기게 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사전에 온갖 어렵고 힘든 단어는 직접 써넣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은 날, 내 입안은 삶의 잔인함에 바짝 말라 텁텁해졌다.


세상에는 살인, 방화 같은 나쁜 말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또 세상에는 죽음, 이별 같은 슬픈 말들이 많지만,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든 말도 ‘거짓말’이다. 나쁜 일도, 슬픈 일도 결국 그 시작은 작은 거짓말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들킨 후 처음 했던 말은 "너 호강시켜주고 싶어서 그랬어."였다. 거짓말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여자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도 괜찮다고 여긴 것이다. 바란 적도 없는 풍요로움 때문에 바보가 된 사람의 마음 따위는 애초 그의 안중에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행동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속여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 이미 코는 길어져 모두가 다 알아버렸지만, 정작 본인만은 자신의 코를 보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허리는 꺾이고 다리는 휘청거렸다.

그가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걸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라는 말을 먼저 알았더라면, 그는 혹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그의 코가 더 길어졌는지를 살피느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아니, 내게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겨울, 겨울, 겨울, 겨울뿐이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그는 '너를 위해 그랬다'는 거짓말 뒤에 숨었고, 나는 내 결혼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기 싫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라는 희망 뒤로 숨는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코가 길어지는 줄도 모른 채, 서로 다른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연극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거짓말을 살피느라 계절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 역시 이 차가운 겨울을 끝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저앉은 자리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의 인내조차, 사실은 무너진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형태의 도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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