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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pr 23. 2022

일생일대의 일탈

백수가 되기로 했다.

출근하기 싫은 날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10년 직장 생활에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결국 저를 버티게 해준 한 가지는
월급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일에서 얻는 즐거움과 보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변했을 때 저는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부터 나는 정말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회사에 대한 불만이야 늘 있어왔고, 직장인 중에 회사 생활이 즐겁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뭔가 다른 느낌, 회사에 대한 실망이 나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임계점에 다다른 느낌이랄까.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더 이상 회사를 다니기 힘들 것 같다는 위기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다들 사표는 마음속에만 품고 있는 것 아니던가. 현실은 회사를 다녀야만 한다. 대출도 남아 있고, 딱히 달리 먹고 살 대책도 없다. 나의 노후와 부모님의 노후도 준비해야 한다. 남편이 일을 하고 있지만, 나를 먹여 살리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동갑내기 학교 친구에서 부부가 된 우리 커플은 언제나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정립해 왔다.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속되는 관계는 생각할 수 없다. 언젠가 결혼이 가까워졌을 때 남편에게 한 약속도 있었다. “내가 퇴직하는 날이 당신도 퇴직하는 날이야. 절대로 당신 혼자 돈 벌어 오라고 하지 않을 거야!”


덜컥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으니 이직을 해야 하나 싶어 직무 경력도 상세하게 정리를 해 보고, 타 기업 공고도 슬쩍슬쩍 들여다봤다. 다른 업종으로 옮겨가며 연봉을 많이 올렸다는 지인들의 귀띔에 마음이 들썩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고민할수록 이직으로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지속할 것이라면 지금 이 회사에서 쌓아 둔 것들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직을 해서 다시 인정받으려면, 새로운 환경에서 얼마나 나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지 훤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 마음을 붙이고 좀 더 버텨 보려고 했다. 동료들과 더 가깝게 지내기도 하고, 하던 일을 더 정성껏 열심히 해서 더 많이 인정을 받기도 했다. 다시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 할 이유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회사에 대한 좋았던 기억과 나의 애정을 다시금 일깨우려 직장인으로서의 나에 대한 글을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모두 소용이 없었다.

나는 점점 내가 더 이상 회사일을 내 일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담당하는 업무에 대해서 이왕 할 일이라면 판을 키워 부서의 핵심 업무로 성장시키려고 고군분투하고, 지지부진한 일은 내 담당이 아니라도 나서서 매듭짓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회사에 문제가 보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려고 애쓰던... 그런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내 업무가 더 늘어나지 않기를,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힌 일이 내 일이 되지 않기를, 변수 없이 오늘도 내 계획대로 칼퇴 할 수 있기를..’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나도 너무나 낯설었다. 나는 이제 일에서 즐거움도, 보람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 온 나의 회사 생활이라는 탑이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모양으로 완성되도록 마무리하고 싶었다. 스스로 열심히 해 왔다고, 부끄러운 바 없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 그만두고 싶었다. 실수도 많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적도 있겠지만 절대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인정받는 지금이 예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활이 길어지고 시간이 흐른다면, 내가 자격 없다 손가락질하던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리더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나와는 다른 이유지만, 긴 직장 생활은 어렵겠다고 얘기하던 남편까지 함께 퇴직하기로 했다. 내가 긴 휴식기를 가지는데 남편이 없다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혼자 긴 여행을 갈 수도 없을뿐더러,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 같은 상황은 아마 나 스스로를 당당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그러면 제대로 된 ‘쉼'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사실 남편도 나 못지않게 직장 생활에서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리더급으로 올라갈수록 회사가 요구하는 모습과 스스로의 성향이 너무나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면 함께 쉬고, 함께 우리의 다음 직업을 탐색해 보자고 설득했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때 도전해 보자고.

[우리만의 퇴직 기념식]


당장 대출과 먹고 살 일이 아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복권 당첨됐냐고 묻기도 할 정도로, 나는 지금 대책 없이 백수가 되기로 결정했다. 남편도 나도 개근상은 놓친 적 없고, 직장을 다니면서 지각 한 번 한 적 없었다. 그저 성실하게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렇게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정한 대로 살아왔다. 그런 내가, 우리가 이런 일생일대의 일탈을 저질렀다. 불안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탈이 되지 않을까?


퇴직금을 까먹으면서 놀기로 한 오늘을,
훗날 우리 인생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한때로 추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와 우리의 퇴직 연대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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