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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28. 2021

01 입사, 첫사랑

당산철교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눈물이 날 뻔했다.

취업이 참 힘들었던 저는 한동안 매일 출근할 때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때마다 뭉클했습니다. 짧았지만 회사에 대한 미움 하나 없이 그저 사랑하기만 했던 시절 기억하시나요?


아, ‘서류전형에 불합격하셨습니다.’라는 말은 내게 너무도 아픈 말이었다. 서류 광탈. 그게 내 이야기였다. 당시의 나는 서류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고 믿었고, 다시 돌아가도 그때의 내가 더 추가할 수 있었던 이력은 없을 것 같다. 학점과 어학점수, 자격증, 학생회, 봉사활동.. 뭐가 모자랐을까? 자소서를 더럽게 못썼나? 아무튼 수십 장의 이력서를 내고, 수십 번의 불합격 메일을 받는 일로 내 하루들이 채워진 그 시간은 조금 무서웠다. 정말 내게 미래가 없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에는 서류전형 합격 후 바로 면접이 아니라 인적성시험 전형이 있는 회사가 많았다. 그래서 면접만 보던 시절보다 서류에서 더 많은 합격자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때 취업을 준비하던 나와 주변 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 수많은 회사에서 서류전형이 탈락한다는 게 더욱 가망이 없게 느껴졌다. 어떤 회사에서도 나를 찾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자격 미달이라고 낙인이 찍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재수에 전공도 5년 과정이었다. 더군다나 중간에 다른 길에 도전할까 하는 방황으로 2년의 휴학까지 했다. 나와 함께 취업을 준비하던 학교 선후배들, 스터디 친구들, 면접에서 만나게 된 지원자들 중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는 보지 못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 중에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서류전형 탈락이 반복되자, 나이 때문인가 하는 자격지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내가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느껴졌고, 좌절을 자기발전에 대한 동력으로 바꾸기 어려웠다. 나는 실체 없는 차별(?)에 대한 분노를 불쏘시개 삼아 자신을 태웠다. 소모적인 감정이었고, 극복하기 어려운 좌절이었다. 물론 나이가 영향이 없진 않았겠으나, 어쨌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결국 합격한 회사가 있기도 했고, 다른 데서 원인을 찾고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의 노력을 지속하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성적으로는 그게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에 지금도 다니고 있는 이 회사에 최종 합격을 했다. 일부 회사는 서류전형 결과도 발표가 안됐을 시점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인적성시험, 1,2차 PT면접, 임원면접까지 할 건 다 했는데도 어느 회사보다도 빠르게 전형이 진행됐다. 나중에 들으니 우수한 인재를 선점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때의 나는 정말 애간장이 녹아내리고 있었는데, 그 절실함에 가장 먼저 응답해준 대상이 지금의 회사다.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처음 본 생명체를 어미로 알고 따르는 것처럼 맹목적인 사랑에 빠질 수밖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나는 고민 없이 고용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이 회사를 다니기로 결정했다. 회사에 학교 핑계를 대고 다른 회사 면접에 응시하는 동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후로 받은 다른 회사들의 다음 전형에 응시하라는 메일은 모두 휴지통으로 옮겼다. 합격 후 비교하고 재는 것이 조금 더 영리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조금은 어리석은 짓도 서슴없이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 아닌가. 나는 불확실한 도박은 조금도 욕심나지 않았다. 그만큼 불안했고 절실했으니까. 그냥 합격의 즐거움을 편히 누리고 싶었다.

 


나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건너 출근을 시작했다. 당산철교 위에서 그 잠시간 지하철 창 너머로 강 위에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해를 보았고, 또 출근할 회사의 건물도 보았다. 매일 뭉클함이 샘솟았다. 정말 눈물이 나는 날도 있었다. 나도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안도감이 마음을 꽉 채우고, 이곳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긴장감에 두근거렸다. 딸아이 상처될까 불안하다는 말씀도 못하시던 부모님에게 죄송했던 마음이 녹았고, 함께 미래를 설계해 나가고 있던 남자친구에게 부끄러운 연인이 될까 봐 조렸던 마음도 느슨하게 풀어졌다. 먼저 취업하고 심지어 승진을 앞둔 친구들에 대한 부러운 마음, 질투심, 자격지심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강물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채용되던 즈음의 회사는 모회사에서 분리되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인재를 꽉 잡아야 한다는 의지로,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신입사원들에게 정성을 쏟았다. 신입사원의 패기와 맹목적인 애사심이 더해져 정말 출근길이 즐거웠다.


같은 회사를 10년 가까이 다니게 되면 오래된 친구처럼, 연인처럼, 부부처럼 회사와 애증의 관계가 되어버린다. 나도 그렇다. 내 청춘을 바친 이 회사를 사랑하기도 하고, 또 지긋지긋하도록 잘 아는 만큼 더 싫증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를 돌이켜 보면 짧지만 단꿈에 젖은 신혼의 추억 같다. 당산역에서 9호선을 갈아타는 지옥 같은 출근길도 행복하기만 했다. 사람이 너무 많은 구간이라 발이 밟히고, 가방이 다른 사람의 가방에 찍히고 걸렸다. 인명사고도 났던 악명 높은 환승구간이니까. 결국 두어 달만에 출근용으로 새로 산 신발 한 켤레와 가방 두 개를 버리게 됐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런 것쯤 아무 상관없을 만큼. 그리 오래 지속됐던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한동안 출근길은 늘 신났고, 아침 공기렇게 달달할 수가 없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해맑은 소녀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때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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