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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30. 2021

02 신입사원의 첫 출근 OOTD!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김OO 입니다!

첫 출근 하던 날이 기억납니다.
까마귀처럼 온통 까만색을 몸에 걸치고 출근하던
그 시절이 왠지 그립기도 한걸 보면,
 나이가 드는 걸까요?



최종 합격 발표 후 나흘 만에 출근을 시작했다. 11월 12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국내 대기업은 대부분 입사 후 그룹 교육과 자사 교육을 통해 동기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여러 가지 활동과 과제를 수행하면서 애사심을 극도로 끌어올린 다음에야 부서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합격 발표 이후에 그 교육이 시작하기까지도 몇 주 간의 여유가 있는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이 회사는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다닐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당장 출근하라고 했기 때문에 외적(옷이나 신발 등등), 내적(사회 초년생으로서의 각오와 다짐?)으로 첫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은 없었다. 발표를 목요일에 듣고, 월요일에 출근했으니.. 대기업 공채를 경험한 바 있다면 얼마나 파격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합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지방 본가에 다녀오는데 주말을 썼고, 아무 준비 없이, 드디어 월요일 아침은 찾아왔다.

첫 출근 하던 그날은 별로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분명히 모든 합격자가 면접에서 입었던 까만색 정장을 입고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대로 새카만 것들을 몸에 둘렀다. 까마귀나 진배없다. 염색한 바 없는 머리는 까만색 머리끈으로 묶고, 흰 블라우스에 까만색 치마 정장을 걸쳤다. 살색 스타킹에 까만색 하이힐, 그리고 까만색 가방까지. 면접마다 올림머리를 하고 가는 거라고 해서 망사 주머니로 머리를 올렸었는데, 그나마 그것만은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승무원도 아니고 왜 면접마다 그 작은 망에 숱도 많은 머리카락을 욱여넣느라 고생을 했을까. 아무튼 거의 면접을 상징하는 까마귀 복장으로 출근을 했다. 예상은 들어맞아서 출근한 동기들 모두 남녀 가릴 것 없이 새카만 옷을 두르고 왔었다. 흰 블라우스와 흰 와이셔츠마저 같았다.
그날 동기들과 친분을 쌓으라고 채용팀 주관으로 회식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신입들은 극혐 하지 않을까. 아마 속으로 ‘이 회사는 손절각..’라고 생각할지도. 하지만 나는 재미있기만 했다. 대학시절 술 한잔이 친밀감을 쌓는데 얼마나 촉매 역할을 하는지는 수많은 숙취로 배우지 않았던가. 저녁 모임이 끝나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선발대 몇 명이 비를 맞으며 편의점 몇 군데를 털어 똑같은 비닐우산을 쓸어 담아왔다. 가뜩이나 새카만 정장을 입은 또래들이 몰려다니는 것도 눈에 띄는데, 똑같은 비닐우산까지 쓰고 첫 퇴근을 하는 장관을 연출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틀간의 오리엔테이션을 단벌 정장으로 보내고, 배정된 부서로 출근하는 날부터 시작됐다. 나는 정장이라고는 면접용 까만색 치마 정장 한 벌뿐이었고, 옷장에는 대부분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만 그득했다. 그리고 입어본 적 없는 오피스룩을 쇼핑할 패션 센스도 없었다. 이 옷, 저 옷 마구잡이로 살 돈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서 출근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지켜보고 효과적으로 쇼핑을 해보기로 마음먹고, 3일째 되던 날도 까마귀 복장으로 출근했다. 첫날이었기 때문에 3일째 같은 옷을 입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선배님들도 역시 신입사원의 상징이라며 까만색 정장을 반가워하셨다.
그런데 나는 멘붕이 찾아왔다. 자율복장이 정착된 회사라 오피스룩이라 특정 지을만한 패션의 공통점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저래도 되나 싶게 캐주얼한 옷을 입은 선배들도 있고, 또 정장도 아니고 뭔가 엄청 엄청 드레시한 원피스를 차려입은 선배들도 있었다. ‘아, 망했다. 무슨 옷을 사지?’ 나는 결국 그날 회사 건물 지하 쇼핑몰에 있던 여성복 전문 SPA 브랜드에서 까만색 스커트 하나와 목둘레 모양만 다른 흰 블라우스 두 개를 샀다. 일단은 매일 같은 옷을 입기엔 부끄러워서 그 옷들로 2주일을 버텼다.

첫 주에는 흰 블라우스에 까만색 스커트를 입은 나를 보는 선배님들마다 “아, 신입사원이구나?!” 라며 반겨주셨다. 하지만 2주째가 되자, 선배님들은 이제 다른 옷을 입어도 된다고 넌지시 얘기 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아마도 2주째 말미였던가 3주째였던가 싶다. 소속 부문 임원이 직접 안 그래도 된다고 하시기에 이르렀다.
“여기가 장례식장이야? 상복도 아니고 언제까지 까만색만 입을 거야? (주변 선배들을 둘러보며 농담으로) 누가 시켰어? 신입사원은 렇게 입어야 된다고 한 사람 누구야?”



나는 그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런 농담을 들었을지언정 결론적으로 나의 부족한 패션 센스 회사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보수적인 제조업 기반의 회사는 내가 마치 시어머님이 “아가, 이제 벗어도 된다.” 할 때까지 녹의홍상(녹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라는 뜻으로 새신부를 상징하는 한복) 입고 아침을 차린 며느리처럼 아주 예의 바르고 됨됨이가 바른 신입으로 평가해 주었다. 기가 막힌다. 내가 유치원 때 엄마가 보던 드라마에 나온 것 같은 시어머니들이 지금 이 시대에, 하필 이곳에 존재한다니. 그때부터 깨달은 것 같다.


신입사원은 갓 시집온 며느리 같은 거였다!
그리고 내 시댁은 80년대 드라마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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