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첫 해외여행을 갔다. 친구와 함께 태국에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지만 인도양 쓰나미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재해가 있었다. 관광지를 폐쇄하고 긴급철수를 권고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여행을 미루는 것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배를 타고 근처 국가로 5박 6일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배안에서 캔맥주를 부딪히며 술은 무슨 맛으로 먹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스물한 살 여름, 우리는 1년 반 동안 준비한 여행을 시작했다. 각자 200만 원의 예산으로 한 달 동안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종단할 계획이었다. 대학생의 방학은 시간보다 돈의 가치가 큰 기간이다. 우리는 오래 걸려도 가장 저렴했던 38만 원짜리 항공권을 끊었다. 방콕까지 가는데 22시간이 걸렸지만 16시간을 더 쓰고 25만 원을 아꼈다면 스타트가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간을 더 쓸 의향도 있었지만 38만 원보다 좋은 가격은 나오지 않았다.
'충동적'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고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에게 1년 반 이란 시간은 적당한 준비 기간이었다. 나와 반대의 성향인 친구에게 최대한 즉흥적인 것처럼 연기하려고 했지만 이미 성실하게 연출된 계획이라는 걸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들켜버렸다. 가이드북이 마치 선배의 선배의 선배를 거쳐 대물림 된 필수 전공책만큼 낡아 있었던 것이다. 사이사이 이동수단과 예상 소요시간, 터미널 위치, 내리는 위치, 티켓 가격 등 유난히 탈 것에 대한 정보를 많이 메모해 놓았다. 여전히 이동력이 약한 모습이다.
스물한 살 아직 미성년자의 티가 남은 대학생 두 명의 여행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어딘가 구멍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큰 구멍은 숙박에 관한 것이었다. 배낭여행의 도시답게 태국은 저렴한 숙박시설이 많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방콕의 카오산로드라고 할 수 있다. 카오산로드를 트립어드바이저에서 검색하면 '저렴한 음식점, 숙소, 나이트라이프 스폿이 몰려 있는 배낭여행자의 성지'라는 설명이 나온다. 트립어드바이저가 인정하는 배낭여행자의 성지라면 여행에 관련된 모든 걸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방콕의 숙박에 대해서는 미리 예약하지 않고 현장에서 구하기로 했다. 수첩에 일 순위와 차선으로 몇 군데 숙소를 써 놓긴 했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즉흥여행 수준이었다. 순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론 가격이다.
첫날은 일 순위였던 도미토리에 갔다. 카오산로드에 있는 곳이었는데 낡은 방에 철제 침대가 두 개 있었고 화장실의 변색된 세면대를 보자 전날 먹은 음식이 올라오려고 했다. 보이진 않았지만 작은 동물 혹은 곤충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옆방과의 경계벽이 5 밀리미터 두께의 송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칫하다간 벽 손상으로 돈을 물어낼 수도 있었기에 하루만 자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두 번째 숙소는 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전날의 도미토리보다 열 배의 값을 냈지만 넓은 룸과 하얀 침구, 단독 화장실까지 있어 마음이 편했다. 호텔 하면 떠올리는 모습의 호텔이 아니기에 호텔이라고 부르기 민망하지만 이 숙박업소의 사장님은 번번이 호텔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이 호텔에서 카오산로드로 나가려면 좁은 골목길 사이에 있는 어떤 반 실내 공간을 지나가야 했다. 요즘의 재래시장처럼 폴리카보네이트로 지붕을 올린 모습이었다. 처음 이 길을 지날 땐 휴무일이었는지 문이 닫혀있었고 이 공간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까만색 문이 달려 있을 뿐.
우리는 여행을 시작하고 열흘만에 아주 깊게 잠들었다. 숙면을 위한 최고의 솔루션은 호텔이었다. 무늬뿐이더라도 말이다.
아침엔 작은 마당의 철제 테이블에서 조식이 제공되었다. 브랙퍼스트 프리라고 쓰여 있는 서비스의 내용은 마실 것 한 가지와 구운 빵, 그리고 마멀레이드 쨈이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주인아저씨는 거친 억양으로 커피오아띠~? 라고 물었다. 프리인 것도 감지덕지인데 선택지까지 있다니. 우리는 여기 정말 잘 골랐다며 별 다섯 개를 주었다. 친구는 여기에 묵는 나흘 동안 커피를 시켰고 나는 세 번은 티, 한 번은 커피를 시켰다. 앞서 시킨 세 번의 티는 티백으로 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였다. 평소 마셔본 홍차의 수색과는 완연히 다른 '홍'차보다 '블랙'티가 어울릴만한 짙은 색이었다. 쓰고 떫은맛이 날까 봐 긴장하며 한 모금 마셨더니 색에 비해 굉장히 순하고 옅어 여행 중이라 입맛이 유연해졌나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정보에 의하면 우리나라 물은 연수이고 유럽의 물은 경수라고 한다. 둘을 나누는 기준은 경도 차이인데 물에 녹아있는 칼슘과 마그네슘 등 미네랄의 양에 따라 나뉜다. 삼다수, 백산수 같은 우리나 생수는 경도가 낮은 연수, 에비앙은 경도가 아주 높은 경수이다. 경수에서는 차가 더 어둡게 우려 지고 반대로 연수에서는 맑게 우러난다. 당연히 차 맛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마도 그 호텔에서 사용한 물은 경수였을 것이다. 조식으로 마주한 세 번의 브랙퍼스트 티를 떠올리면 붉은색이라는 뜻의 홍차가 유럽에서는 블랙티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유럽식 아침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카오산로드로 나갔다. 친구가 머멀레이드 쨈을 아주 맛있게 먹어서 같은 브랜드의 쨈을 보게 되면 몰래 사놓고 선물해줄 생각이었다. 총예산이 아무리 적어도 이 정도의 낭만은 가능했다. 사람보다 개가 많았던 골목길에 시끌벅적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까만색 문이 며칠 만에 열린 모양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왠지 불안해져서 먼 길로 돌아갈까 했지만 반대쪽엔 들개가 있었다. 우린 둘 다 개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사람'쪽을 택했다. 여기만 지나면 큰 길가였다. 하지만 까만 장막의 안쪽을 보자마자 태국의 개들은 결코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곳은 무에타이 연습장이었다. 이렇게 길가와 실내의 경계가 모호한 곳에 링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남자들은 대체 왜 윗옷을 벗어도 괜찮은 걸까. 조물주도 너무하시지. 여자들은 상체의 실루엣만 드러나도 온갖 지저분한 말이 붙는다. 패딩을 입어도 범죄의 표적이 되는 마당에 아무리 더워도 입어야 할 건 입어야 한다. 상의를 탈의한 남자들의 무리는 왠지 위협적이다. 우리가 스물한 살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쪽수로 한참 밀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우리를 우습게 봤다는 점이다. 왜냐면... 여자니까. 만약 우리에게 남자 일행이 있었다면 그저 연습에만 열중하는 조기 무에타이회였을 터이다. 당황한 우리의 눈빛을 읽었는지 놀려 먹기 좋은 상대를 발견한 빨간색 바지들은 휘파람을 불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태국어로 연신 말을 걸었다. 위기 대처능력보다 눈물샘의 기능이 탁월한 나는 눈이 이미 축축해졌고 나보다 멋진 성격의 친구는 꺼져!라는 말로 두려움을 숨겼다. 열린 까만 문이 있는 5미터 정도의 짧은 거리를 걸어 나오는 동안 이 멋진 친구를 위해 무조건 쨈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없는 게 없는 카오산 로드니까.
그 호텔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는 커피를 택했다. 경수에 우린 어두운 홍차에 빨간 바지가 자꾸 아른거려서 마시기 거북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캣 콜링이라는 단어도 몰랐고 그게 범죄가 된다는 생각도 못했지만 나는 분명히 피해자의 기분이었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뉴스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기사는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이다. 오늘도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린 여성, 지속적인 데이트 폭력으로 앞니가 전부 부러진 채 살해당한 여성, 여학생들을 성희롱한 남교사가 같은 학교에 재임용된 뉴스를 연이어 읽었다. 얼마나 쉬우면 강남역 한 복판에서도 일어났을까. 여성들은 안전 이별에서 벗어날 수 있긴 한 걸까. 대다수의 올바른 시민 남성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기엔 무서운 소식이 너무 많다. N번방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범죄가 아니듯 지금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을 어두운 이들이 두렵다. 모순적이지만 세상이 살기 좋아지는 만큼 망가지는 속도도 비례하는 것 같다. 후자에 집중하다가는 금세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왕이면 앞의 속도에 맞춰보려고 한다. 다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현실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고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눈물샘의 기능보다 '꺼져'라는 말에 겹겹이 쌓아 올릴 목소리들이다. 여성에게 있는 과도한 겸손과 배려 대신 '그런 것'까지도 굳이 말로 하는 미덕을 이제야 실행해 본다. 목소리를 내다보면 비례선이 조금은 주춤할 때가 오지 않을까.
티 마스터 자격증의 마지막 관문은 직접 베리에이션 티를 만드는 실기이다. 나는 향긋한 열대 과일향이 나는 홍차로 동남아시아 느낌을 냈고 여기에 블루베리즙을 첨가해 좀 어두운 수색으로 추출했다. 그리고 붉은 라즈베리를 올렸다. 경수에 우린 짙은 홍차에 둥둥 떠다니던 빨간 바지. 내가 만든 이 티의 이름은 Backpacking black tea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