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 : 첫 번째 글

Valencia Cafe

by 진메리

참고:*표시는 업로드하면서 첨언한 것이다.



14시간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는 인천-런던행 비행 중 쓰고 있다. 기내식을 한번 받았고 영화 알라딘을 보다가 자파가 램프를 차지하는 때부터 잠이 든 것 같다. 일어나서 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아직도 도착까지 두 자릿수 시간이 남았다.


내 인생 첫 번째 휴대전화였던 20년 전 싸이언 cyon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정확히는 24년 전이다.) 용량은 그대로일 터인데 처리 속도는 갈수록 늦어지고 사용한 지 3년이 지나 4년째에 접어드니 하나를 저장하려면 두 개를 지워야만 했다. 아니면 외장 메모리를 두던가. (여기서 '처리'란 친구에게 받은 이미지로 배경화면을 꾸미는 것을 말한다. 스마트폰의 정보처리능력을 생각했다면 싸이언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처음이자 마지막 싸이언이었던 녀석을 재회하여 그의 퍼포먼스를 최대한 지속할 수 있도록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가 들어가는 장문메시지는 바로 삭제하고 2002년 월드컵 당시 분위기에 휩싸여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축구선수 사진들도 저장하지 않을 테다.


나 역시 지난 20여 년 동안 불필요한 정보가 많이 쌓인 것일까. 버려야 할 것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순간의 욕심과 권태에 빠져 정리하지 않은 채 살았던 모양이다. 싸이언처럼 여행 셋째 날을 기억하려면 여행 첫째 날과 둘째 날의 기억이 위태롭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일기를 쓰기로 했다. 용량제한 없는 외장하드를 두는 셈이다.


*매일 밤 쓰는 것이 목표였으나 막상 여행을 시작해 보니 하루 단위가 아니라 반나절 단위로 위태로운 것이다. 오후 8시를 기억하려니 오전 8시가 삭제되기 직전인 상황. 그리하여 첫날부터 하루를 마무리하며 쓰는 일기가 아니라 앉아 있을 때마다 조금씩 기록한 반나절기, 또는 반의 반나절기가 되었다.*


이 여행은 오재일 은퇴 기념 여행이다. 40세인 오재일은 9년간의 유소년 야구와 21년 동안의 프로야구를 합하여 만 30년을 야구선수로 살았다. 포기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들을 극복한 그를 위한 여행이다. *시작은 이러했다.* 남은 비행시간 동안 일기를 다 쓰고 알라딘을 끝까지 본 뒤 여행 타이틀에 걸맞은 일정을 짜볼 생각이다. (가이드북도 없고 와이파이도 안 되는 게 문제다.)


여행 인원은 나, 오재일, 오승아 세명이다. 오재일은 J로, 오승아는 S로 쓰겠다. (S는 만 9세를 향해 가고 있으며 겨울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일기를 SNS에 올리려고 한다. 몇 가지 매체를 생각하다가 브런치에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플랫폼은 휘발성이 강한 느낌이 들어 일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결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갤리에 마련된 스낵바에서 물과 견과류를 가져왔다.) 이는 인스타 좋아요를 포기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기장은 집에서 쓰던 독서노트를 가져왔다. 따라서 문장력과 어휘력이 초등학생 음악줄넘기부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몇 장을 앞으로 넘겨 필사해 둔 작가님들의 반짝이는 표현들을 빌려다 쓸 예정이다. 어디서 읽었거나 들어본 문장이다 싶으면 틀림없이 그 느낌이 맞을 것이다. (이 부분을 쓰면서도 앞 장을 넘겨 보고 싶은 충동이 들어 아몬드를 오도독 씹었다. 혀를 깨물어 눈물을 이겨내는 것처럼 말이다.)


비행기의 맨 뒷좌석에 앉아 있는데 화장실 가기가 내 집만큼 편하다. 비행기 타면서 액체류를 이렇게 부담 없이 마셔본 적이 없다. 게다가 승무원인 지연 언니의 조언대로 좌석을 지정했더니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 공간이 여유롭다. 눕코노미란 이코노미 좌석에서 두세 칸 차지하여 누워가는 것을 말하는데 지연 언니의 조언은 이러하다.


이 비행기는 세 좌석씩 붙어있고 사이에 복도가 있는 배열이다. 다시 말하면 333 구조인데 가운데 세 좌석 양 옆으로 복도가 있다. 나와 S는 가운데 세 좌석 중 복도 쪽으로 한 자리씩, J는 창가 쪽 세 자리 중 복도 쪽으로 지정하라는 것이다. 장거리를 이동하는 승객들은 화장실 사용이나 스트레칭 등을 위해 움직임이 편한 복도 쪽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란히 세 좌석을 지정했다가 이렇게 변경했더니 정말로 안쪽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조금 전에 S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상하체가 완벽한 눕코노미석을 이용 중이다. 옆의 J는 긴 다리를 편하게 벌리고 앉아 영화를 틀어놓고 있지만 눈꺼풀의 개폐 동작이 느려지는 게 곁눈질로도 보일 정도이다. 혼자만의 싸움을 그만하고 상체만이라도 눕코노미를 이용하길 바란다.(하프 눕코노미라고 이름 지었다.) 한숨 자고 나서 나와 자리 교대를 해주는 협력관계로서의 배려를 기대해 본다.


*그런 일은 없었다. 그의 단점은 기내의 식음료 서비스를 적절하게 이용해 끝까지 잠을 이겨낸다는 점이다. 대한항공에서 싫어하는 승객상인지 지연 언니에게 물어보겠다.*

일기를 쓰는 도중에 간식으로 핫도그를 받았고 다시 잠들었다가 기내가 밝아져서 깼다. 두 번째 기내식이 준비 중이다. 비행시간이 네 시간 남았다. 지금 이 문장을 쓰다가 전자여행허가인 ETA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어제 하려고 했는데 박문각 공인중개사 합격자 모임에 참석하느라 까맣게 잊었다. 불안과 걱정의 네 시간이 될 것 같다.


싸이언도 저장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알람은 제때 울렸다. 할 일은 하는 싸이언보다도 못한 기분이 들었지만 기내식으로 나온 돼지고기김치찜을 먹고 희망을 갖기로 했다. 기내식도 이렇게 발전한 시대에 '지명수배 중인가요-아니요', '테러할 건가요-아니요', '무기 갖고 있나요-아니요' 한 뒤 돈만 내면 되는 단순 절차에 불과한 ETA는 현장에서 발급이 될 거라고 말이다.


아직 일기를 쓰는 중이기에 타이틀에 걸맞은 여행일정을 구상하지 못했다. 기내에는 착륙을 준비하오니 안전벨트를 매고 좌석 등받이를 바로 해달라는 음성이 나온다. 지금이야말로 일정을 생각하기 좋은 시점이다. 일단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ETA 앱을 다운로드하고 아니요를 몇 번 누른 후 돈을 내는 게 확정적 첫 일정이다. 신의 가호가 있길...


​다음 일기부터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