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encia Cafe
지금으로부터 네 시간 전 영국 입국 신고장의 보안구역에서 ETA(전자여행허가, Electronic Travel Authorisation)를 신청하고 지하철을 50분 동안 탄 뒤 도보 3분 거리를 9분 동안 걸어와 호텔방에 들어왔다.
영국은 기대 이상으로 이방인에게 관대한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기대치가 워낙 낮았던 것일까.) 출입국 직원은 상기된 나를 진정시키듯 리슨 케어풀리로 운을 뗀 뒤(정말로 말했다.) 고된 동양의 삶을 위로하며 그럴 수 있다고 했다. 특히 한국인은 항상 바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 해서웨이처럼 당장 한쪽 귀와 어깨 사이에 휴대전화를 끼우고 오른손에는 커피, 왼손에는 명품 종이가방을 잔뜩 들어야 할 것 같다. ETA 신청(앱으로 한다)은 깜빡했어도 수시로 sns를 확인하는 노고를 알아준 영국의 공무원 덕분에 무탈히 방에 도착해 일기를 쓰고 있다. 나랏일을 다정하게 처리한 한 명으로 인해 세 명의 한국인은 영국에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으니 올 해의 모범 영국인상에 그를 추천하고 싶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J와 S는 누웠고 나는 간단하게라도 내일 동선을 체크하고 잘 생각이다.
예전(홑몸으로 배낭여행 다니던 시절: 대학생이었다.)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가이드북을 몇 번이나 읽고 꼼꼼하게 일정을 세워 여행을 떠났었다.
싸이언이 된 지금은 용량 초과가 걱정인 나머지 <런던에서 보물찾기>를 한번 읽었고 알고리즘이 찾아준 몇 가지 유튜브 영상과 수없이 많은 숏폼을 보고 왔다. 그날의 계획은 전 날밤 결정하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안될 때는 '발길 닿는 대로 DAY'로 지정한다.(지금까지 두 번 있었다. : 2주 이상의 해외 가족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언뜻 들으면 근사해 보이지만 6월 4일 육포데이만큼이나 하릴없는 데이다. 아무래도 말초적인 짧은 영상에 중독된 뇌가 점점 열등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어둠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공항에서 첫 끼를 먹었고 기내식으로 두 끼, 방에 짐을 풀고 물을 사러 나갔다가 본 호텔 1층 펍에서 맥주 한 잔과 또 한 끼를 했다. 네 번의 식사를 챙겨 먹었지만 여전히 여행 1일 차이다. 두 번째로 긴 하루였다. (첫 번째는 결혼식 날이었다.)
아! 그리고 그 펍에서 프리미어리그를 틀어놓고 있었다. 런던에서 이 시각의 펍이란 그들의 생명수인 맥주도 마시고 그들의 끼니인 감자도 먹고 그들의 사랑인 축구도 보는 장소인 것으로 해석된다. 대부분의 메뉴에 삶거나 으깨거나 튀기거나 구운 감자가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