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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Apr 05. 2022

몽글몽글 여유를 그리는 방법

오일파스텔 원데이 클래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아주 유명한 속담이다. 곁에 있는 친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크고 작은 많은 것들이 변한다. 사소하게는 말투나 성격이 비슷해지고, 크게는 직업이나 삶의 가치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친구 D는 말을 참 예쁘게 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여리며, 속이 아주 깊은 아이다. 그리고 그 아이만이 가진 고유한 감성을 섬세한 표현으로 풀어낸다.


 마음을 맴도는 문장을 예쁜 메모지에 필사하는 것도, 지극히 사소로운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 것도 그 친구를 보며 자연스레 따라 하게 되었다. 그런 친구의 취미 중 한 가지는 오일 파스텔로 그림 그리기였고, 볼 때마다 재료의 질감이 궁금해 꼭 한번 사용해 보고 싶었다.


 내가 사용하는 어플에는 참 많은 클래스가 올라와 있고, 오일 파스텔 클래스도 예외는 아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체, 색감을 고르고 골라 열댓 개의 클래스를 추리고, 그중에서도 후기와 수강생의 완성작을 꼼꼼히 살피고 합리적인 가격과 시간을 심사숙고해 골랐다.


 작은 회의실 느낌이 나는 공방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정갈하게 세팅된 재료들이다. 연습용 종이, 브러시, 마카와 색연필 그리고 대망의 주인공인 '오일 파스텔'.


 오일 파스텔은 어릴 적 크레파스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로 많이 소개되는 재료였다. 실제로 생긴 모양새나 그렸을 때 도화지 위에서의 느낌이 크레파스의 질감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이가 숫자 한 자리이던 아주 어린 시절의 향수가 스치는 듯도 하였으나 아주 잠깐이었다. 그 정도의 과거는 기억이 나는 일도 몇 없을뿐더러, 나는 크레파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도화지에 거칠게 문질러지는 느낌이 불쾌했고, 뭉툭해서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없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지금에야 손에 묻지 않는 크레파스가 나왔지만, 하도 색칠해서 작아진 몽당 크레파스를 쥐느라 손이며 옷에 색이 묻어나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아, 크레파스 냄새도 싫어했던 것 같다. 어쩜 문구 하나를 대상으로 이렇게도 안 좋은 점만 줄줄 열거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일 파스텔은 달랐다. 크레파스와 비슷하지만 안 좋은 점만 골라 쏙쏙 뺀 느낌이었다. 부드럽게 칠해졌고, 모서리로 섬세한 표현도 가능했으며, 여러 색을 섞어도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게 오일 파스텔에 대한 내 첫 감상이다.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선을 긋고, 색을 채우고, 여러 색을 섞기 위해 문지르는 연습을 하면서 느낀 오일 파스텔에 대한 설렘 같은 것.


 필압을 조절해서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오일 파스텔을 시작하면서, 진행하면서 느낀 유일한 난관은 '문지르기'였다. 선생님이 칠할 땐 슥슥 부드럽게 퍼지는데, 내가 문지르면 뭉치고 까지고 난리가 났다. 색이 고르게 도화지에 입혀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절망했고, 다시 생각했다. '아 역시 손재주가 없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이것도 오늘 이 시간부로 끝낼 취미구나'라고.


 수강생 중 나만 재주가 없는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에도 '와 사진 예쁘게 잘 찍으셨네요', '와 예뻐요! 잘 그리셨네요!' 칭찬해 주시고, 덤덤하게 '한 번만 더 연습해 볼까요?' 하는 친절한 선생님 덕분에 몇 번 연습을 거듭하다 보니 좌절감이 사그라들고 손에 느낌이 익었다. 손가락 끝으로 눌러 문지를 때 생기는 마찰열로 오일 파스텔이 녹고 펴지면서 종이에 고르게, 조화롭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요령 없이 힘만 주고 문지르니 손가락만 아프고, 색은 뭉치거나 까졌던 것이다.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하고 나니 그림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더라. 시간이 가는 것도, 내가 있는 공간도, 가지고 있던 오만 잡념도, 심지어 애플 워치에서 꾸준히 울리는 카톡 알람도 제대로 느끼지 않고 그림 그리는 순간에 빠졌다.

 

 110분 정도를 투자한 첫 작품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남겼던 광안리 해수욕장과 광안대교. 워낙에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 몇 번을 꺼내봤던 장면이다. 그림을 완성해놓고 보니 사진을 찍고 보정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감동과 울림이 있더라. 여행지에서 사진 대신 그림으로 순간을 담는 어떤 이들의 심정은 이런 걸까, 그날에 주어진 여유를 손끝으로 그려내면서 온전히 만끽하는 것?


 직접 그림을 그려보고 나니까, 멀리서 봤을 땐 몰랐던 장면 속 디테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 그림만 하더라도 물결, 윤슬, 파라솔의 그림자, 파도의 그림자와 그가 남긴 흔적, 부서지는 파도와 조각난 파도까지. 사실 선생님이 옆에서 짚어주시지 않았으면 몰랐을 섬세한 부분이지만. 작은 것들이 하나씩 들여다 보이니 그림도 사진도 다시 새롭게 보였다.


 주어진 시간을 살아지듯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을 또 하나 배웠다. 온갖 세상살이에 밀려 조각난 여유를 떠안듯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여유를 그려나가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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