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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Feb 18. 2022

MBTI 비 신봉자의 망상

 성격 유형을 알아보는 MBTI가 유행이다. 나의 MBTI는 <ESFJ>라고 했다. 외향적이고 계획적이며 친절하지만 현실적이란다. '현실적임'을 다시 풀이하면 다양한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평소에 누가 망상을 하며 살아?' 하고 이 어이없는 풀이를 직장 동료들에게 말하니 C가 말했다. 

"상상력이 부족하신 거 아니에요?"

 소위 망상을 잘한다는 MBTI 유형의 두 동료는 경쟁하듯 자신들의 상상력을 자랑했다.


"길에 가로등이 갑자기 쓰러지면 난 어디로 피하나 상상하지 않아요?"

"저는 갑자기 외계인이 오면 한국말을 할까 영어를 할까 고민해요"

"드라큘라가 분명 어딘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고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악했다. 나는 현실에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떠올리는 것조차 어렵다. 좀비 영화를 볼 때도 '뭐 저런 허무맹랑한 일을 영화로까지 만들까' 싶어 집중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망상인(우리 천문대에서는 N타입을 이렇게 부른다)들은 수업 중에 교실로 좀비가 들어오는 망상이 끊임없이 든다는 것이었다. MBTI 비 신봉자로서 사람의 유형을 16가지로 나누는 것을 반대하지만 극명한 차이가 놀랍기도 하다.


 사실 망상까진 아니지만 사실 나도 가정 정도는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친구 S와 매주 로또를 사며 매주 상상의 나라를 펼치는 것이다. 나와 S는 1등을 했을 경우 같이 행복하기 위해 로또 번호도 똑같은 것으로 산다. 우리는 매번 구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서로에게 챗을 보낸다.

"이번에 느낌이 좋네, 1등 되면 뭐할까^^?"

그러면 친구는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1등 되면 코로나 때문에 수업 취소해달라는 사람들 기분 좋게 다 환불해주자고. 그리고 하와이로 은하수나 보러 가자"

"그래, 그거지!"


 물론 1등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등은커녕 5등도 안된다. 한 번을 속 시원히 당첨된 적도 없으면서 계속 복권을 사는 나도 웃기지만, 복권이 당첨되면 집을 산다거나 고가의 물품을 사는 대신 손님들에게 웃으며 환불을 해주겠다는 S도 웃기다. 아니 웃프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다. 행복은 좋은 것을 더 가질 때보다 고민스러운 것이 사라졌을 때 더 진하게 찾아오는 법이다. 나는 새로 나온 자동차를 좋은 가격에 구매했을 때 보다 사랑하는 친구와 마주 앉아, 평소엔 비싸서 엄두를 못 내던 위스키를 마시며, 불현듯 찾아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시시콜콜한 과거 대학 생활 이야기를 나눌 때 더 행복했다. 한껏 취해 토론하며 싸우다가도, 다음날 김치찌개로 해장하고 커피를 한 잔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S의 MBTI 유형도 나와 똑같은 <ESFJ>다. 같은 성격 유형이라 꾸준히 친하게 지내는 걸까? 글쎄다. 실상 그와 나는 성격은 영 다르다. 나는 가는 곳마다 지갑이며 차키며 흩뿌리고 다니고, S는 늘 그것들을 조용히 주워서 고운 욕 한 바가지와 함께 챙겨준다. S는 고기를 직접 맛있게 구워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걸 좋아하고, 나는 고기 집게와는 원수를 진 것처럼 거리를 둔 채 고기를 구워주는 S를 영웅처럼 바라본다. 이런데 우리가 같은 MBTI라고? 역시 믿을게 못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우정도, 사랑도, 성격도, 즐거움도 MBTI로 결정되지 않음을 믿는다. 어쩌면 무엇도 MBTI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MBTI가 즐거운 건 아닐까?

 나는 망상하지 않는 <ESFJ> 인간이지만 다음 달엔 코로나가 사라지지 않을까, 이번 주엔 복권이 당첨되지 않을까 상상하며 복권을 구매한다. 내일도 모래도 망상은 안 하지만 기대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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